Opinion :이영아의 여론 女論

성폭행의 상처를 홀로 견뎌야 했던 김명순

중앙일보

입력 2012.09.03 00:24

업데이트 2012.09.0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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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아
명지대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연실이는 문득 선생의 숨소리가 괴상해져 가는 것을 들었다. 연실이는 눈을 들어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도 선생이 술 먹은 줄은 몰랐는데 지금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 점을 연실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순간에, 선생의 얼굴에는 싱거운 미소가 나타나며 팔을 펴서 연실이의 어깨를 끌었다. 연실이는 선생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순간에 직각하였다. 끄는 대로 끌렸다. 그날 당한 일이 연실이에게는 정신상으로 아무런 충동도 주지 못하였다.”(김동인, 『김연실전』)

 김동인의 『김연실전』은 1920년대의 여성 문인이었던 김명순(金明淳)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위의 대목은 김명순이 이응준이라는 군인에게 성폭행당했던 사건을 김동인이 재구성한 장면이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이 사건을 세 차례에 걸쳐 싣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일본 국정여학교에 다니고 있던 김명순은 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단에서도 삭제당했다.

 그런데 김동인의 소설에서 연실은 성폭행당한 일에 대해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생 출신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성적으로 문란하여 화려한 남성 편력을 가졌던 여성으로 간주됐다. 김명순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비단 김동인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순수문예지인 ‘창조’의 동인이었고 이광수 등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았던 문인이었음에도 남성 지식인들은 그녀를 자유분방한 여성으로만 취급했다.

 하지만 사실 성폭행 사건과 그것이 세간에 회자된 일은 그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였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 자살 기도를 했었다. 또한 자신의 수필에서 그때의 일을 “한 사람에게 받은 한 능욕과 멸시로 된 네 모든 수치의 저수지가 어느 날 하루 잊힐 날이 있었으랴. 하물며 그로 인해서 모든 세상에게…돌리우고 거기서도 또 학대를 더 주지 못해서 흐물거리는 그 정경에서랴”(‘네 자신의 위에’, 1925)라고 회고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흥미거리로 취급하던 세상 속에서 ‘절벽 위에 홀로 선’ 듯한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오늘날 성폭행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사건을 입에 올리며 분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들은 가해자에 대한 응징에만 집중하느라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상처에는 무감각한 듯하다. 지금 가장 상처받고 분노하고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을 우리는 제대로 감싸 안고 있는 건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영아 명지대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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