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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제, 역사의 교훈으로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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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그래픽=박용석 기자]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미국에서 동아시아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독도와 종군위안부를 둘러싼 마찰을 감정적인 문제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내가 첫 연구 과제로 한·일 관계를 맡은 뒤 지난 20년간 이를 공부하면서 얻은 교훈을 소개한다.

 첫째, 한·일 간의 역사적 원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독일이 자국의 역사적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유럽인들에게 독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유럽인들은 여전히 독일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다. 한국과 일본 사이엔 외교협정(예를 들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 등)이나 다른 합의를 통한 일시적인 해결책만 있었을 뿐 근본적인 분노와 적개심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분석가나 정책 입안자는 역사적 원한이 서울과 도쿄 관계의 바탕을 이룬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둘째, 한·일 관계는 원한이 어느 정도인가가 아니라 그 원한이 실용적인 협력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가에 달려 있다. 군중이 모이면 감정적이 돼 분노에 찬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끼리 머리를 맞대면 이러한 집단적 감성을 극복하고 이성적이며 서로 국익에 맞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이와 관련한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최악의 사태는 특정 이슈와 관련해 한쪽이 현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양측이 역사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할 수는 있지만 한 측이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상대방을 “제압하려” 든다면 아무런 이익도 없이 관계 악화만 초래할 뿐이다. 현 상황의 변화는 문제를 확대하기만 할 뿐 해결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교훈은 최근 사태를 분석하는 바탕이다. 역사 문제는 한·일 관계에서 엄연히 살아 숨쉬는 과제다. 내가 볼 때 최근 한·일 간의 외교분쟁은 양측에서 현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한 데서 출발한다. 한·일 관계는 거의 매년 똑같은 일이 반복되며 여기에는 일종의 균형이 있다. 일본의 방위백서와 문부성의 교과서 지침, 그리고 한국 측의 분노와 항의를 유발하는 일부 일본 정치인의 뻔뻔한 발언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항의 사태는 한두 주 정도 한국 미디어의 톱 제목을 채우지만 한바탕 소란을 겪은 뒤엔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들은 이런 균형을 깨고 사태를 더욱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한국 측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현 상태를 바꾸려고 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는 앞으로 나올 한국의 모든 신임 대통령에게 하나의 족쇄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대대로 한국 대통령에게 독도를 방문해야 하는 의무를 지운 셈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의 한국 대통령이 독도 방문을 하지 않기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야당이나 다른 측으로부터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일본은 24일 중의원이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선례를 만들었다. 한국을 상대로 일본 국회가 여야가 함께 이런 종류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53년 이승만 라인 설정과 관련한 ‘한·일 문제 해결 촉진 결의’ 이후 거의 60년 만이다. 이는 서울과 도쿄 간의 정치적인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대단히 부적절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본 국회에 한국이 비슷한 일을 벌일 경우 또다시 비슷하게 대응하도록 부담을 지운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본 관료들이 미국에서 종군위안부 기념상을 세우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미 정치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것도 새로운 선례의 하나다. 이는 서울과 도쿄 관계에는 물론 워싱턴-도쿄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역사 논쟁은 이제 두 정부 사이의 실질적인 협력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우선 10월 말로 완료 예정인 한·일 통화 스와프 협정의 갱신 문제를 일본이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걸려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의 국채 매입 계획을 재검토하는 문제도 있다. 미국은 역사적 원한이 아시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두 동맹국 간의 실용적인 협력을 가로막기 시작한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지금 생기고 있을까. 분명히 국내 정치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분쟁에는 정치보다 더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국제사회의 지정학적인 트렌드가 확연히 바뀌고 있음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여러 면에서 지구촌 2부 리그로 강등될 위기에 처해 있는 일본이 이젠 자기 주장을 마구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집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글로벌 무대에서 최근 들어 일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한국은 이제는 일본의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장 눈에 보이는 해결책은 없다. 내가 배운 역사의 네 번째 교훈은 역사적 원한은 양국 모두에서 정치적인 정당성을 얻을 때만 완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 지도자는 역사적인 화해를 국내 정치의 긍정적인 요소로 승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독일이 적극적인 사과와 반성을 통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을까.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