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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안대희, 포토라인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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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내성적이다 보니 원칙을 고집하게 됩디다. 대범하면 융통성도 발휘할 텐데… 다른 길로 벗어나는 걸 스스로 용납하지 못해요.”

 2009년 11월 당시 대법관 안대희(57)를 인터뷰했을 때였다. 2006년 대법관에 임명된 뒤 줄곧 언론 인터뷰를 사절하던 그는 그때 처음 인터뷰 자리에 나섰다. 인상적이었던 건 시종 긴장한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예상 답변지를 든 두 손이 가볍게 떨리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에게 “강하지 않은 분이 어떻게 대선자금 같은 큰 수사를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내성적인 사람이 원칙을 지킨다”는 게 안대희의 답이었다. 그는 사법연수원 때 별명이 ‘수줍은 사무라이’라고 했다.

 안대희가 김대중 정부 시절 검사장 승진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진 것도 그의 캐릭터와 관련이 있다. 저질 연탄 사건, 서울시 버스회사 비리, 바닷모래 불법 채취…. 대검 중수 1·3과장, 서울지검 특수1·2·3부장 등 ‘특수통’의 정통 코스를 밟았지만 “너무 잘 드는 칼”이란 평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가 ‘국민 검사’로 부각된 건 사법시험(17회)-연수원(7기) 동기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궤적과 맞물려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대검 중수부장에 임명된 그는 대선자금에 대해 성역 없는 수사를 독려했다. 이때 모인 ‘안대희 사단’은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특수 수사를 이끄는 주축이 됐다. 2009년 노 전 대통령 사건을 수사했던 이인규 전 중수부장도 대선자금 수사에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이 수사 도중 숨지자 대법관이던 안대희는 봉하마을로 문상을 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분은 돌아가시고 수사팀은 사퇴하고…양쪽을 다 아는 입장에서 많이 괴로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혐의가 있으면 수사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수사는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했다.”(본지 인터뷰 중)

 안대희의 35년 공직 생활은 원칙 내지 고지식함이란 키워드로 요약된다. 그는 그 흔한 재테크에도 눈을 돌리지 않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시가 3억원이 되지 않는다는 강북의 아파트에서 24년째 살고 있다.

 그런 안대희가 대법관 퇴임 48일 만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캠프에 정치쇄신특별위원장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하는 대법관에겐 재임 중은 물론 퇴임 후 일정 기간은 정치적 중립이 요구된다. 대법관이 재임 중이나 퇴임 후 감사원장(이회창·김황식), 법무부 장관(안우만) 등 공직에 간 적은 있지만 퇴임 직후 특정 후보의 캠프로 들어간 사례는 없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퇴임사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선거에 뛰어든 것”이라고 했다. 그를 믿고 따르던 후배 법조인들의 마음도 착잡하다.

 “9월부터 미국 스탠퍼드대로 연수를 가신다고 했는데…박 후보가 두 번 만나서 설득했다는 거죠? 그래도 선거 캠프에 들어가실 줄은….”

 안대희는 평생을 건 시험대에 올랐다. 이번 선택과 ‘원칙 있는 삶’ 사이에 거리가 느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그의 변신에 대한 판단은 “‘차떼기’로 대표되는 정치 구태와 측근·권력형 비리, 선거부정 등을 근절하는 대책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실천에 옮기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만약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돈 공천을 뿌리 뽑을 혁신안을 내놓고 박 후보에게서 ‘공천 개혁’ 선언을 끌어낸다면 수사로 다하지 못한 정치 개혁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소신이 박근혜식 정치와 어떤 화학적 반응을 일으킬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제 오후 기자회견을 위해 여의도 당사에 들어서던 안대희는 사진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자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적 야망에 몸을 맡긴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언제든 그만두겠다”는 각오대로 원칙을 지킬 것인가. 분명한 건 국민 모두가 지켜보는 포토라인에 그가 서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