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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예술 후원해 무형적 가치 창출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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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예술과 명품의 만남’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예술가의 작품이 브랜드 제품의 소재가 되는 것 정도는 흔한 일이 됐다. 명품 브랜드 수십 개를 거느린 기업가는 예술품을 수집하고 이를 모아 미술관도 짓는다. 이런 세상이니 예술과 명품의 ‘의기투합’은 더 이상 새로워 보이지 않는 트렌드다. 그런데 최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한 이탈리아 브랜드가 마련한 ‘예술과 명품의 만남’을 크게 다뤘다. 인류 문화의 전성기, 유럽의 ‘르네상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문예를 부흥시킨 ‘메디치가(家)’에 빗대 이 브랜드의 활동 소식을 전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로마국립현대미술관(MAXXI)’에서 열리고 있는 부부 작가 호르헤·루시 오르타의 전시 ‘로마 이야기’의 작품들이다. 텐트(원제 Tenda)

남성복으로 알려진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이하 제냐)가 그 주인공이다. 프로젝트명 ‘제냐트(ZegnArt)’. 브랜드 이름 ‘제냐(Zegna)’와 예술(Art)을 합쳐 지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이탈리아의 ‘로마 국립현대미술관’(MAXXI)에서 열린 부부 작가 루시(Lucy)와 호르헤 오르타(Jorge Orta)의 전시, ‘로마 이야기(Fabulae Romane)’ 후원이다. 지난 3월 시작한 이 전시는 다음달 23일 막을 내린다. 지금껏 다른 명품 브랜드가 벌인 이벤트와 무엇이 달랐기에 ‘제냐트’가 새삼 주목을 받은 걸까. 제냐트를 총괄하고 있는 안나 제냐(55) 제냐재단 이사장을 e-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에르메질도 제냐 설립자의 4대손이다.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도맡고 있다. 안나 제냐에게 ‘21세기 메디치가 되기 위한 노력’에 대해 물었다.

1 터널에 사는 사람(원제 Tunneler) 2 신화를 만드는 사람(원제 Myth Maker) 3 나는 사람(원제 Flying Man) [사진= 에르메네질도 제냐]

-‘명품과 예술의 만남’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아닌 것 같다.

“패션은 결국 미술의 한 형태다. 문화를 창조하고 진흥하는 방법인 셈이다. 프라다나 루이뷔통, 에르메스 등 명품 브랜드 역시 이런 이유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비슷 비슷한 프로젝트들이 아닌가.

“제냐트와 다른 브랜드 프로그램의 가장 큰 차이는 무형성이다. 제냐트는 미술관을 짓거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순수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현대 미술의 발전에 동참하는 것이다. 작품을 담아내는 ‘포장’에 신경쓰기보다는 우리의 의도가 공유될 수 있는 ‘기회’, 무형적 가치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제냐트의 프로그램은 ‘공공미술 프로젝트’ ‘글로벌 스토어 프로젝트’ ‘스페셜 프로젝트’ 등 세 가지 분야로 나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개발도상국과의 교류다. 이들 나라의 문화·미술 관련 기관들과 상호교류하면서 매년 공익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장기 과제다. “현대 미술에 있어 새로운 교류와 문화 전파의 장이 된다”는 게 안나 제냐의 설명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제냐트 쪽에서 해당 국가의 젊은 작가를 선정하고 국제적 위상이 있는 현지 기관과 협력해 그가 공공 예술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후 그 예술가를 이탈리아로 초청, 작품 활동을 후원한다. 올해는 인도, 내년은 터키, 그 다음해는 브라질과 교류가 예정돼 있다. 모두 1년 단위 과제다.

두 번째는 ‘글로벌 스토어 프로젝트’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예술가들의 작품을 제냐의 간판매장 격인 ‘글로벌 스토어’에 전시한다. 매장이 하나의 갤러리가 되는 셈이다. 안나 제냐는 “예술이 제냐의 연구개발(R&D)에 있어 필수요소가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매장이란 열린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예술을 나눠야 한다는 게 제냐 그룹 신념”이라고 덧붙였다.

세 번째는 ‘스페셜 프로젝트’다. 오르타 부부의 전시로 시작한 것이 이 분야다. “글로벌 스토어의 예술 작품 중 특색이 있고 방식 면에서도 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작가군을 결집시키려는 시도”라는 게 안나 제냐의 설명이다. 스페셜 프로젝트는 큐레이터 한 명이 모든 걸 진두지휘하지 않고 각 프로젝트의 종류나 참여 예술가에 따라 각기 다른 큐레이터가 참여해 현대 미술의 주인공을 조명한다.

-순수 예술에 대한 대규모 후원 행사이니 회사 입장에선 꽤 큰 금액을 투자했을 것 같다.

“예산을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다. 양해해 달라. 프로젝트의 전체 방향에서 드러나듯 우린 상업적 접근보다는 ‘윤리와 미학’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업주부터 4대를 내려오며 사업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고 문화교류를 해 왔기 때문이다. 무형적 가치 창출이 우선이란 건 이런 맥락에서다.”

(왼쪽부터)안나 제냐 제냐재단 이사장,호르헤·루시 오르타 부부,에르메네질도 제냐 제냐그룹 회장.

-NYT는 제냐트가 기업(제냐)-예술가(오르타 부부)-공공기관(MAXXI)에 모두 이로운 ‘윈(win)-윈-윈 프로젝트’라고 표현했다.

“기업 입장에선 당연히 우리 브랜드에 대한 주목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더불어 우리의 가치도 공유할 수 있다. 참여 아티스트는 든든한 후원을 통해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고, 전시를 주최하는 미술관은 작품을 기증받아 소장품을 확보한다는 장점이 있다. 공공 미술관 같은 기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려면 기업적으로 운영돼야 하고 경영 마인드가 필요한 시대다. 유럽 재정 위기로 어려운 때인 만큼 공공부분과의 협력이 더 절실하다. 무엇보다 예술에 대한 관심은 20대, 80대를 가리지 않는다. 제냐의 고객 역시 마찬가지로 연령이 다양하다. 우리는 예술의 후원자가 됨으로써 더 많은 고객과 공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어떤 명품 브랜드는 예술 후원을 지나치게 하다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냐 역시 기업이므로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만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제냐 재단이 벌이는 환경보호 활동 같은 것도 단발성이 아니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예술 후원활동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치공유라는 뚜렷한 목표 아래서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은 없다.”

-특히 예술 분야에 명품 브랜드가 애정을 쏟는 이유는 뭘까.

“명품 브랜드라고 해서 예전 작품을 모아둔 ‘아카이브’에서만 영감을 얻는 게 아니다. 새로운 자극제로서 예술이 필요하다. 게다가 신흥 시장에 진출할 때 예술은 훌륭한 소통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현지 작가의 작품이 놓인 매장을 통해 고객과 소통하기 시작하면 훨씬 이야기가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예술이 과거에는 브랜드를 자극하는 촉매제 정도의 역할을 했다면 현대적인 의미에선 새로운 소통 창구 기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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