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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믿었던 박정환마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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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환

중국에서 열린 바이링배 세계대회를 보면서 강산이 변해도 크게 변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찡해 온다. 19일의 32강전에서 일본의 명인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이 중국의 14세 소년 셰얼하오 2단에게 10집반 차로 대패했다.

그 옆에선 본인방인 이야마 유타 9단이 한국의 무명기사 김현찬 2단에게 불계패했다. 오랜 세월 세계바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서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일본의 명인과 본인방이 이제는 동네북 신세가 됐다.

 같은 날 한국의 자랑인 이세돌 9단이 중국의 장웨이제 9단에게 졌다. 조금 유리한 형세였는데 어느 순간 불계로 무너지고 말았다. 올해 21세인 장웨이제는 지난 2월 이창호 9단을 누르고 LG배 우승컵을 차지한 중국랭킹 4위의 신흥 강자다. 문제는 중국에 이런 정도의 강자가 득시글거린다는 점이다. 그들의 위력에 밀려 한국 기사들도 추풍낙엽으로 떨어져 나갔다. 8강전까지 한국기사 중 유일한 생존자는 박정환 9단. 그는 16강전에서 장웨이제를 꺾어 이창호-이세돌의 패배를 설욕했다. 감격적인 승리였다. 불리하다는 중론이어서 8강에 단 한 명도 올라가지 못하는구나 탄식하고 있었는데 후반 뒷심을 발휘하며 승리를 따냈다. 딱 한 명이 살아남아 중국과 1대7이 됐지만 그 한 명이 한국랭킹 1위 박정환이기에 우승에 대한 믿음이 갔다.

 한국은 최근 중국에 매번 밀렸으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지난해 삼성화재배는 원성진 9단이, 올해 비씨카드배는 백홍석 9단이 우승하며 감격적인 승리를 이어갔다. 쇼는 중국이 하고 컵은 한국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런 행운(?)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2주 전의 삼성화재배 예선 결승에서 한국은 중국에 1승7패라는 참패를 맛봤다. 이번 주의 바이링배 본선은 아예 중국의 독무대가 됐다. 그러고도 우승컵은 한국이 가져올 수 있을까.

 23일의 8강전에서 박정환이 중국의 저우루이양 5단(랭킹 7위)에게 졌다. 초반,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상처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결국은 이런 사태가 왔다. 4강에 한국이 한 명도 없다.

 권력 이양기에 서 있는 한국바둑은 지금 박정환이란 19세 청년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 세계대회 우승은 단 한 번뿐이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박정환. 그가 왕좌를 이어받아 이창호처럼 일당백의 전성시대를 이뤄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동네북이 된 일본처럼 우리도 힘든 시간을 맞이할지 모른다.

한국 바둑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 옛날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계 최강이란 왕관을 벗어던지고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허리를 졸라매야 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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