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KBS-2TV ‘개그콘서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멘붕스쿨’의 갸루상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노랗게 탈색한 머리, 눈 주변을 까맣게 칠하고 나와 “아니무니다” 화법을 구사하는 소녀. 그 모습을 보고 일본 여행 중 도쿄 하라주쿠 길목에서 갸루 언니들을 처음 마주쳤을 때의 충격을 떠올린 건 필자만은 아닐 터다.
영어 ‘걸(girl)’을 일본식으로 읽은 게 ‘갸루’다. 1970년대부터 젊은 여자들을 통칭하는 말로 쓰였는데, 지금처럼 독특한 외양의 여성들을 뜻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여기엔 ‘초대 갸루’로 불리는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있었다. 까무잡잡하게 태닝한 피부와 짙은 화장으로 눈을 강조하고 나타난 이 가수가 10~20대 여성들의 수퍼스타로 떠오르면서 그녀를 모방한 화장법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화장법이 점차 과장되게 변하면서 갸루상 스타일까지 이르게 된다.

갸루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공통점은 짙은 눈화장. ‘개그콘서트’의 갸루상처럼 검은 얼굴, ‘화장이라기보단 분장’을 고수하는 이들은 ‘야맘바(일본 전설 속의 마귀할멈)’, 혹은 ‘맘바’로 불린다. 갸루 화장에 공주풍 복장을 즐기는 소녀들은 ‘히메(‘공주’라는 뜻)갸루’, 얼굴을 희게 화장하는 이들은 ‘시로(‘희다’는 뜻)갸루’라고 하는 식이다. 초창기 갸루 문화는 일본에서도 일종의 사회문제로 다뤄졌지만, 차츰 일본 특유의 서브컬처로 자리 잡게 된다. 시부야의 유명 쇼핑몰인 ‘시부야 109’가 갸루 전문쇼핑몰로 거듭나 대성공을 거뒀고, 갸루들의 패션쇼인 ‘도쿄 걸즈 컬렉션’도 매년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혈액형이 뭐냐”는 질문에는 “피가 없스무니다”, “사람이 왜 그래?” 하면 “사람이 아니무니다”라고 답하는 갸루상의 ‘무정체성의 정체성’은 신기하게도 갸루라는 집단의 특성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도 갸루는 ‘남들이 뭐라든 내 스타일을 고수하는 무한대의 개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종 줄임말과 특유의 문법을 가진 ‘갸루 문자’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니까.
갸루상 개그를 둘러싸고 일본의 일부 네티즌들이 “일본 비하”라며 흥분한 모양이다. 물론 웃자고 한 개그에 정색하고 나서는 건 ‘오버’다. 하지만 만약 일본 방송에서 누군가 한국인의 말투를 흉내 내며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개그를 했다면, 한국 네티즌들이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고 쿨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갸루상을 보고 킬킬대면서도 마음 한쪽이 자꾸 찜찜한 건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