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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곡동 주민센터 공부방 지키는 공군 선생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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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경규 상병, 이재권 일병, 복준영 일병, 김범준 상병.

공부방 하면 주로 대학생이 저소득층 아동을 가르치며 자원봉사하는 곳이지만 공부방도 공부방 나름이다. 강남구 세곡동엔 강남 스타일 ‘명품’ 공부방이 있다. 매주 화·목요일 세곡동 주민센터에서 열리는 이 공부방은 명문대 출신의 공군 제15혼성비행단 병사 10명이 강사로 나선다. 소문을 들은 일반 학생과 학부모가 줄을 댈 정도다. 주민들은 병사들의 정성에 감명받아 장학회까지 만들었다

‘선생님 특수부대’가 세곡동 주민센터에 떴다. 지난달 26일 오후 6시 30분, 센터 내 회의실 4곳에서 공부방 수업이 열렸다. 공군 제15혼성비행단 소속 병사들이 2명씩 짝을 이뤄 중1~고3 학생을 학년별로 1, 2명씩 앉혀놓고 맞춤형 집중지도에 돌입했다. 수업 과목은 영어와 수학. 병사들은 화이트 보드를 이용해 수업을 진행했다.

군인선생님이 가르치는 공부방은 지난 2월 시작됐다. 업무상으로 만나게 된 비행단 김대중(49) 대령과 세곡동 우정수(54) 동장이 부대와 지역 특성을 맞춘 공부방 프로젝트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이뤄졌다. 김 대령은 군에서 대민업무를 맡고 있다. 지난 1월 비행기 소음 민원 조사 차 센터를 찾았다. 우 동장과 이야기하다 이 지역에 저소득층 학생이 많다는 점을 알았다. 그는 부대에 우수한 병사가 많아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로 뜻을 모았다.

김 대령은 곧바로 부대 내 군인선생님을 모집했다. 매주 화·목요일 병사들의 휴식시간인 오후 6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학습지도 봉사를 할 지원자의 신청을 받았다. 10명 뽑는데 120여 명이 몰렸다. 김 대령은 신청자를 집합시켰다. 휴가를 가더라도 수업이 있는 날엔 꼭 참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자 10여 명이 빠져나갔다. 1년 이상 할 수 있는 자, 봉사활동 유경험자, 신청서 작성 성실도 등을 꼼꼼히 평가했다. 이 기준을 만족하는 병사도 많아 소속 지휘관의 평가를 들어야 했다. 병사뿐 아니라 군 간부도 있었다. 이창진(39) 원사다. 12대 1의 경쟁률과 엄격한 선발과정을 뚫은 최정예 선생님 부대는 6개월이 흐른 지금까지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비행단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김 대령은 “군 부대가 혐오시설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 알리고 싶었다”며 “지역주민을 도울 기회가 마련돼 기쁘다”고 말했다. 우 동장도 “마침 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부대가 나서 줘 감사하다”고 전했다.

문재영(22) 상병의 꿈은 교사다.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다니던 중 군에 왔다. 군에서 의미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 신청했다. 그런데 문상병의 교육 의욕과는 다르게 맡은 학생이 공부방 수업에 자주 빠졌다. 친구들과 놀러가거나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가버리기 일쑤였다. 문 상병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칠 때마다 돌아가는 학생에게 “보고 싶으니깐 다음에 꼭 만나자”고 다짐해 보냈다. 그러자 점차 학생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두 달 전부터 수업에 빠지지 않고 집중했다. 문 상병은 “교사를 하려는 것은 학생을 바른쪽으로 변화시키고 싶기 때문”이라며 “바뀐 모습을 보니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복준영(28) 일병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를 거쳐 토론토 대학원에 입학한 후 군에 왔다. 영주권 심사를 통과한 상황이어서 오지 않아도 됐다. 한국인으로서의 도리라 생각해 군복무를 결심했다. 복 일병은 중1 학생을 맡아 영어를 가르친다. 그는 “성적을 올리기보다는 영어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알게 해주고 싶다”며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자기 미래의 가능성을 깨닫게 돕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수의학과에 다니다 입대한 이재권(21) 일병은 고3 학생을 맡았다. 이 학생은 언어·수리·외국어 영역에선 2등급 이상이었지만 과학탐구영역은 늘 7, 8등급을 맴돌았다. 이 일병은 예정에 없던 과학탐구영역 족집게 맞춤지도에 들어갔다. 성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3월 모의고사에서 7, 8등급이었던 과학탐구영역 두 과목이 6월 모의고사에서 모두 2등급으로 수직 상승했다.

그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실생활에서 사례를 찾아 쉽게 설명해주고 잘못 알고 있던 개념도 바로잡아 줬다”고 말했다. 이 일병은 생명공학과 진학을 바라는 학생에게 진학 전략도 코치해주고 있다. 이 일병은 “아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며 “원하는 대학에 반드시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카이스트를 다니다 군에 온 이경규(22) 상병도 군인선생님으로 활약하고 있다. 휴가 기간에도 공부방 수업이 있는 날엔 인천 연수구의 집에서 시외·시내버스를 번갈아 타고 와 학생을 가르쳤다. 이 상병은 “아이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꼭 지키고 싶었다”며 “6개월 동안 같은 학생을 보니 친해져 쉬는 것보다 함께 수업하는 것이 더 즐거워 먼길을 달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열심히 따라와 주는 학생에게 고맙고 전역 후에도 꾸준히 만나고 싶다”며 멘토 역할까지 다짐했다.

일과성 행사려니 했던 주민들은 병사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지난달 장학회를 만들었다. 세곡동 주민자치회·방위협의회원과 일반 주민 등 총 27명이 힘을 보탰다. ‘세곡나눔장학회’라고 이름도 짓고 각자 원하는 만큼 매달 돈을 모아 석 달에 한 번씩 공부방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선발 기준은 성적이 아니라 수업 참석률이다. 이봉수(52) 세곡나눔장학회장은 “주민센터 공무원들과 비행단의 노력을 보고 감동했다”며 “장학회를 만든다고 크게 알리지도 않았는데 돕겠다는 주민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주변에서 자기 자녀도 끼워줄 수 없는지 꽤 물어본다”고 귀띔했다. 세곡동 내 여러 주민 회의때마다 통장 등 참석 위원들을 통해 자기 자녀를 공부방에 넣어 줄 수 없는지 압력(?)을 넣는 주민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저소득층 자녀 요건이 못돼 거절되기 일쑤다.

우 동장은 “학생들과 군인선생님 관계를 앞으로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전용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다”며 “이들의 만남이 멘토와 멘티로 평생 이어져 저소득층 아이들이 마음껏 꿈을 펼치는 좋은 나눔 모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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