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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객 캠핑장으로 변한 영어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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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3일 경기도 파주시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 입구에 오토캠핑장과 레일바이크 시설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파주=김도훈 기자]

11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 입구에 ‘오토캠핑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한글과 영어로 쓰인 현수막이 보였다. 300m를 걸어 들어가니 주차장에 텐트 10여 개가 세워져 있었고, 피서객들이 고기를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영어만 사용한다는 영어마을’이 마치 유원지 같았다. 캠핑장 이용료는 1박당 3만원인데 안에 있는 영어마을을 구경하려면 별도로 1인당 3000원을 내야 한다. 영어마을은 지난해 7월 주차장 일부를 텐트 77채 수용 규모의 캠핑장으로 바꿨다. 관광객 대상의 레일바이크도 운영 중이다.

 파주 영어마을은 경기도가 1000억원 가까이 들여 2006년 조성해 직접 운영해왔다. 부지 넓이가 27만㎡로 전국 32개 영어마을 중 가장 크다. 하지만 만성 적자에 시달려 지난해까지 최근 3년간 적자액만 111억원이다. 이에 경기도는 경영난 해소를 위해 2011년 도의회 승인을 받아 지난해 캠핑장과 레일바이크 사업에 뛰어들었다. 영어마을 취지와 동떨어진 수익 사업을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영어권 문화를 체험하고 공부하게 하자는 취지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조성한 영어마을이 변질되고 있다. 실용회화 중심의 영어교육은 줄어들고 캠핑장, 레일바이크, 취업 면접 학원, 미국 대입수능 강좌를 하는 ‘기형적 마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어마을은 2004년 경기도 안산에 처음 생겼는데 몇 년간은 인기가 있었다. 파주캠프도 2006년 개장 첫해엔 51만 명이 찾았다. 하지만 2008년 영어마을이 전국적으로 21곳이나 생기자 국무총리실은 “과잉투자”라고 지자체에 경고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11개가 더 생겨 현재는 경기도 10곳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32곳이나 된다. 마을 숫자는 늘었지만 전체 이용자는 2008년 43만 명에서 지난해 30만 명(교육과학기술부 추정)으로 감소했다. 파주캠프도 지난해엔 2만1538명에 불과했다.

 학기 중 영어마을 정규 프로그램에서 가장 긴 것은 4박5일짜리로 1인당 15만원을 받는다. 영어마을이 난립하고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이용료를 더 올려 받기도 어렵다. 수요가 많은 방학에는 4주짜리 프로그램을 개설해 200만원대를 받는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중1 자녀를 둔 권모(44·여)씨는 “4박5일 교육으로 영어가 얼마나 늘겠느냐. 그 비용으로 학원을 보내는 게 낫다”고 말했다. 중2 학부모 이모(45)씨는 “방학 중 프로그램은 동남아권 해외연수에 비해 가격이 전혀 저렴하지 않다”며 “같은 비용이면 해외연수를 보내지 누가 영어마을을 찾겠느냐”고 말했다.

  영어체험 프로그램만으론 운영이 어렵자 영어마을들은 영어체험과 무관한 사업에 손을 대게 된 것이다. 경기도의회 윤은숙 의원은 “파주캠프의 캠핑장 사업을 승인할 때 의견이 분분했지만 할 수 없이 경영난을 벗어나게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영어마을은 파주와 창녕을 제외하곤 대부분 민간 위탁으로 운영된다. 운영업체는 적자를 호소하며 고가의 영업을 하고 있지만 지자체는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가 121억원을 들여 만든 송파구 풍납영어마을은 대학생 대상 취업·면접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4박5일에 30만원인데 한국어로 진행된다. 이곳 관계자는 “적자를 메우려면 취업 프로그램 등으로 돈을 벌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경기도 양평 영어마을은 최근 강남의 한 어학원과 함께 8주에 1500만원짜리 미국 대입수능(SAT) 강좌를 개설했다가 학원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파주=이유정 기자, 박소현 대학생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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