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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강해야 한·중 잇는 다리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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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강하고 잘 살아야 조선족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한국과 중국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링허우(90後·90년대 출생)’ 조선족 린메이나(林美娜·22·상하이 화동사범대 철학과 3년)의 말이다. 린은 창춘(長春)의 조선족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중국어가 더 친숙한 신세대 조선족이다. “한국이 생모(生母)라면 중국은 양모(養母)”라고 말하는 린에게 민족과 국적은 한동안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2009년 9월 상하이 조선족 기업가협회가 마련한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해 “국적보다 민족이 더 중요하다. 비전을 갖고 도전하라”는 김진경 옌볜(延邊)·평양과기대 총장의 축사는 린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린은 지난 7월 국내 한 기업이 주최한 중국인 유학생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 규정상 조선족 유학생은 출전 자격이 없었지만 “조선족이라고 한국어를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당돌한 논리로 심사위원을 설득해 대상을 차지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폭주하는 중국 업무를 맡고 있는 량샤오옌(梁肖艶·양소연) 변호사는 조선족이다. 2007년 상하이의 명문 자오퉁(交通)대학 재료공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차이징(財經)대 법학원에 진학해 2009년 중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상하이 법률회사에서 근무하던 양 변호사는 김앤장에 스카우트돼 올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양 변호사는 성공한 조선족의 대표주자다.

문화혁명 땐 북한으로 탈출
중국의 명문 대학을 졸업했거나 한국에 유학한 조선족 4세대의 당당함 뒤에는 부모 세대의 희생이 있었다. 이주가 잦아 스스로를 ‘보따리 민족’이라고 말하는 조선족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1차 이주는 19세기 후반에 시작됐다. 당시 쇠퇴하던 청(淸)나라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동북지역으로의 이주 금지 정책을 해제했기 때문이다. 평안도·함경도의 농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1910년대 들어 2차 이주가 시작됐다. 한·일강제병합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주를 이뤘다. 동북 조선인 숫자가 20만 명을 돌파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일제에 의한 대규모 3차 이주가 이뤄졌다. 일제는 경상도 농민들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헤이룽장(黑龍江)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945년 갑자기 맞이한 해방은 이주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동북지역에 진주한 국민당은 관할지역의 조선인을 ‘한교(韓僑)’로 간주했다. 자산을 몰수하고 한반도로 귀환을 강요했다. 공산당은 달랐다.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중국 국적을 부여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이 이때 탄생했다.

조선족의 역방향 이주는 1950년 말에 시작됐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하고 대기근이 발생했다. 연이어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조선족들은 북한을 향한 엑소더스(대규모 탈출)에 나섰다. 4차 이주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이 본격화되고, 한·중 교류의 물꼬가 터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조선족에게 잊혀졌던 모국, 잘사는 한국을 일깨웠다. 한국을 향한 5차 조선족 이주가 시작됐다. 조선족은 한국인들이 꺼리는 3D 업종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교 이후 한동안 한국 내에서의 조선족 지위 문제가 한·중 양국 정부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한국 사회를 경험하고 돌아간 조선족들은 고향에서 농사에 만족할 수 없었다. 대안을 찾아 나섰다. 일본·미국·유럽 등 다른 서방 국가, 경제적으로 발달한 중국 연해지역이나 내륙 대도시가 조선족을 유혹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6차 이동이다. 동북3성의 조선족 사회는 빠르게 공동화(空洞化)하고 있다. 조선족의 공식 숫자는 183만929명(2010년 중국 인구조사)이다. 현재 대략 한국 50만, 일본 10만, 미국 7만, 기타 해외지역 3만, 중국의 연해·내륙 도시에 50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다양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국 반대로 한국민 대우 제외
2003년 11월 29일은 조선족에게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참모진의 완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서울 구로동의 조선족교회를 전격 방문했다. 그곳에선 불법체류자로 몰린 일부 조선족들이 국적회복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국적회복은) 국가 간 주권 문제가 있어 대통령이나 한국의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국제 법질서에 따라야 한다”며 농성자들을 위로하고 점진적인 해결을 약속했다.

조선족의 국적 문제는 1999년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의 자유로운 출입국과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재외동포법’을 제정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초안을 본 중국 정부는 “자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월권행위”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여기에 국내 경제적 요인이 보태져 숫자가 많은 조선족과 소련지역 동포들은 국민대우에서 제외됐다. 헌법재판소가 2001년 ‘재외동포법’에 위헌결정을 내려 법안이 개정됐지만 조선족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외국인 고용허가제’와 2007년 ‘방문취업비자(H-2)’ 제도를 신설해 조선족에게 국내 취업의 길을 넓혀줬다. 문제는 올해 방문취업비자가 허용한 5년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7만2000여 조선족의 앞날이다.

곽재석(51) 이주동포정책연구소장은 조선족 비자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선족을 외국인력으로만 취급하는 현 정부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며 “조선족에게도 재외동포 비자를 발급해 이들을 친한 세력으로 만들어 통일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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