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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쉽고 더 독특하게...척 보면 아는 스포츠 공용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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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14면

1 오틀 아이허가 디자인한 픽토그램.어느 문화권, 언어권의 사람이든 직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보편적 시각 언어로 디자인됐다.

런던 올림픽이 이제 막을 내린다. 올림픽은 메달과 기록, 새로운 스타만 낳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으로도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는 우리 삶에 익숙한 시각 환경을 창조했다. 화장실, 비상구 등 각종 사인으로 쓰이는 픽토그램이 바로 올림픽에서 비롯된 것이다. 픽토그램은 간략하게 표현한 그림 언어다. 어떤 문화나 언어권이라도 금방 식별할 수 있는 세계 공용어다. 또 올림픽은 개최국의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로도 활용된다. 올림픽 개최 때마다 새롭게 디자인되는 엠블럼과 마스코트는 그 시대의 디자인 트렌드를 이끌기도 했다.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9> 올림픽 픽토그램

올림픽에서 디자인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대두되고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때부터다. 뮌헨 올림픽은 그때까지 개최된 어떤 올림픽보다 체계적으로 운영된 대회로 평가받는다.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는 기념비적 이정표가 된 대회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60년대에는 독일이 올림픽 개최를 희망한 것 자체가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정치 선전도구로 삼았던 나치에 대한 악몽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뮌헨 올림픽을 독일이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음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조직위원회는 건축과 디자인 같은 눈에 보이는 외형에 민주적이고 긍정적이며 앞선 이미지를 담고자 했다. 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로 선정된 사람이 그래픽 디자이너 오틀 아이허(Otl Aicher)다.

오틀 아이허는 37년 히틀러 청년단원 참여를 거부해 체포된 경력이 있었다. 그 결과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군에 징집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만 전쟁 막바지에 군에서 빠져나와 고향 울름에 숨은 반나치주의자다. 그는 독일에서 나치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숄(Scholl) 남매 중 맏이인 잉게 숄과 함께 전후 조형대학을 설립한다. 이 학교가 전후 모더니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울름조형대학이다. 우리에게는 독일 브라운사의 제품으로 그 디자인 철학이 잘 알려져 있다.

2 런던 올림픽 픽토그램.런던 올림픽은 지역적 색채보다는 지금까지의 픽토그램과 다른 차별화를 시도했다.3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엠블럼과 마스코트.손으로 그린 듯 자유로운 필체의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이후 기업 CI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4,5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픽토그램.아테네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나타나는 그림 스타일로,베이징 올림픽은 한자 스타일로 픽토그램을 표현해 지역적 색채를강하게 드러냈다.6 아이허가 디자인한 뮌헨 올림픽 마스코트 ‘발디(Waldi)’. 발리는 올림픽 마스코트 공식 1호이며, 평면적이고 엄격한 디자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나치 저항 단체인 백장미단을 이끌었던 잉게 숄은 2차대전 당시 친동생 둘이 참수형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나치 패망 뒤 독일에서는 민주주의의 복원과 사회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억울하게 죽은 동생들을 애도하고 파시즘에 대항해 인간성 회복을 대학 설립의 기조로 삼았다. 대학 설립을 추진했던 숄과 아이허는 1952년 결혼한다.

그래서 울름조형대학은 디자인 기술교육 외에 폭넓은 교양교육을 중시했다. 이 학교의 디자인은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를 바탕으로 바우하우스보다 더 엄격한 기능주의를 추구했고, 기하학과 철저한 그리드를 바탕으로 한 규칙과 질서를 옹호했다. 이는 나치가 사회주의적이라고 폐교시켰던 바우하우스의 진보적인 디자인 철학을 부활시킨 것이다. 나치는 고전주의와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디자인을 권장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합리적 디자인 철학을 계승한 오틀 아이허는 올림픽이 갖는 국제적인 성격에 딱 부합하는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픽토그램 디자인은 지역적 성격을 철저히 배제한 순수한 모습이었고, 보편적 시각 언어로서 세계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아이허는 모든 선은 수직, 수평, 45도 각도로만 표현했다. 머리는 동그란 원으로 통일했다. 여기에 활, 자전거, 말 등 각 종목의 특징적 이미지를 부여했다. 자세는 해당 종목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역동적인 것을 취했다.

뮌헨 올림픽에서 처음 도입된 픽토그램은 그 뒤 모든 올림픽에 적용됐다. 아이허가 창안한 새로운 표현양식은 올림픽뿐 아니라 공공장소의 사인 표준이 됐다. 74년 미국 교통부는 공항과 같은 대규모 국제적인 운송 관련 시설물에 사용할 사인 시스템을 미국그래픽아트협회(AIGA)에 의뢰한다. 이때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화장실, 식당, 엘리베이터, 택시, 버스, 철도, 주차장, 금연과 같은 사인이 태어나게 된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디자인 분야에서 또 다른 혁신을 보여준 대회다. 그 전까지 올림픽의 엠블럼과 마스코트는 도식화된 표현으로 디자인됐다. 철저하게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만든 스타일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마치 손으로 자유롭게 그린 것 같은 필체의 엠블럼과 마스코트를 발표했다. 특히 하비에르 마리시칼이 디자인한 마스코트 ‘코비’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스럽게 그린 만화 같은 캐릭터여서 당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낯섦은 잠시였고 세계의 많은 기업은 자연스러운 필체의 CI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픽토그램도 88년 서울 올림픽 때까지는 뮌헨 올림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도식화된 디자인에서 탈피했다. 피카소와 호안 미로 같은 그 지역 예술가들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보편성보다 지역적 색채가 강한 쪽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픽토그램이 대표적이다.

올해 런던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엠블럼은 영국을 대표하는 그래픽 디자인 회사인 울프 올린스(Wolff Olins)가, 픽토그램은 섬원(Someone)에서 디자인했다. 이 엠블럼이 발표됐을 때 영국에서는 영국적 색채가 없는 것은 물론 굉장히 낯설고 어설프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로고가 빈번하게 노출되자 오히려 다이내믹하고 흥미롭다는 긍정적 평가로 돌아서고 있다. 픽토그램은 추상성에서 구상적 형태로 옮겨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보편적 질서와 커뮤니케이션보다 개성과 혁신을 중시하는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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