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누에 치는 여인들 일터 … 풍기문란 우려해 내시가 감독

중앙일보

입력 2012.08.02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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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촬영한 잠실뽕나무 [사진 대한잠사회]

갓 이사온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자기 집주소는 외운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강남·서초·송파구에는 여러 동이 있다. 동 이름 유래나 마을 역사 이야기도 모두 다르다. 앞으로 ‘강남서초송파&’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각 동 이야기를 지역 전문가가 들려준다. 이번엔 서초구 ‘잠원동’편이다.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서초구 잠원동이다.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1977년부터 1983년까지 한신공영과 대림산업이 이곳 뽕나무 밭과 단독주택지를 고층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시켰다.

잠원동은 1963년 이전엔 경기도 신동면 잠실리와 신원리로 불린 곳이다. 경기도에서 서울시에 편입될 때에는 이미 송파구(당시 성동구)쪽에 잠실동이 있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 ‘잠’자와 신원리의 ‘원’자를 따 잠원동이라 부르게 됐다.

이곳은 500여 년 전인 조선 초 성종 때 이미 국가에서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할만큼 양잠업이 성했다. 잠실은 뽕잎을 먹여 누에를 치는 시설이다. 잠실도회는 임진왜란 이후 유명무실해졌다가 조선 말에서 일제 때 많은 뽕나무가 심어지고 잠업강습소가 설치되는 등 양잠업이 다시 성행했다.

잠실도회에서 누에를 치는 여인을 잠모(蠶母)라고 불렀다. 이들을 감독하는 관원은 내시 두 명이었다. 내시를 둔 이유는 풍기문란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 중종 때 잠실도회 부근 뽕잎이 부족하면 근처 민가에 있는 뽕나무 잎을 땄다. 주민들이 항의하면 뽕잎을 따는 노비들이 이들의 아들 딸을 때리거나 장정들을 위협했다. 이후 민가는 뽕나무를 거의 기르지 않았다.

참고로 조선시대 양잠에 관한 시가 남아 있어 소개해 본다.

‘어제 서울 장안에 갔다가 / 돌아와서 서러운 눈물 수건 적시네 / 비단으로 온몸 감은 그네들이야 / 애당초 누에 치는 사람 아니네.’

현재 잠원동 이름에 걸맞은 ‘잠실뽕나무’ 고목이 잠원로 도로변 한신 16차 아파트 120동 앞(잠원동 1-54번지)에 서 있는데 서울시 기념물 제1호다. 이 고목은 조선 초에 심은 것으로 추측하는데 얼마 전에 고사(枯死)해 줄기만 서 있다. 30여 년 전 그 옆에 심은 뽕나무는 잘 자라고 있다.

조선시대 잠실리 지역은 현재 신동초등학교 부근에서 뉴코아아울렛 강남점 일대에 이르는 지역이다. 50여 년 전에는 신동초등학교 정문 남쪽 잠원동 한신아파트 337동 지역을 ‘웃마을’, 뉴코아아울렛 부근을 ‘아랫마을’, 그 중간 한신상가(농가공산품센터) 지역을 ‘간데말’이라고 불렀다.

신동초등학교와 잠원동 대림아파트 사이 폭 8m길은 조선시대에 수원·용인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3남도로’였다. 이 길을 따라 한강변 신반포 16차 아파트에 이르면 잠실나루(일명 점말나루)에 닿을 수 있어서 나룻배를 타고 서빙고나루로 건너갔다.

현재 신반포 27차 화랑아파트(전 한신아파트 351동) 북쪽 옆에는 ‘고 김주용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925년 을축년홍수 때 잠실리 주민들이 수해를 입어 오갈 데가 없자 김주용 선생이 잠실리 부근에 집 20동을 지어 살게 해 1941년 이 지역 유지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세운 것이다.

현재 한신상가 부근에는 ‘할떡거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주민들끼리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 온다.

박경룡

-숭실대학원 문학석·박사

-서초구 지명위원

-국편위 사료조사위원 서울지회장

-㈔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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