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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 외교독립론에 ‘민중+폭력’ 선언으로 맞선 의열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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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호 26면

상해의 일본조계지. 공동조계라고도 불렸던 일본조계지는 한 발만 들이밀면 바로 체포되는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1922년 3월 의열단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의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사건은 상해는 물론 전 중국과 일본, 한국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상해를 조계지로 나누어 차지하고 있던 서구 열강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본 총영사관은 자신들이 관할하는 공동조계는 물론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조계에도 압력을 넣어 한국 독립운동을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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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의 경찰 당국은 ‘불온행동’ 단속 강화의 방침을 공포했다. 골자는 한인 독립운동가의 총기류 휴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중(駐中) 미국공사 샬먼은 상해에서 조선으로 향하면서 “조선인 독립당(獨立黨)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한 수단으로 나오는 데 대해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든지 찬성치 아니하는 바이다”라고 유감의 뜻을 표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의열단에 대한 상해의 외국인 여론을 악화시켰는데, 문제는 여기에 임시정부까지 가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1922. 4. 7)는 상해 임정이 “세관 부두의 폭탄사건(다나카 저격사건)에 대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므로 저들의 행동에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성명을 냈다고 보도했다. 또 임정 측 관계자가 “독립정부 측과 저들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조선독립은 과격주의를 채용하며, 공포수단을 취하여 달할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의열단은 격분했다. 자신들은 박재혁·최수봉이 사형당하고 김익상·오성륜이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관계 없다’고 선을 긋고 나서는 데 분노한 것이다.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김원봉과 유자명은 북경의 신채호를 상해로 초빙해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다. 신채호 역시 의열단의 직접행동을 지지하고 임정의 외교독립론에 부정적이었으므로 흔쾌히 수락했다.

1 조선혁명선언,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고 주장해 일제를 경악에 빠뜨렸다. 2 아나키스트이자 농학자였던 유자명. 김원봉과 함께 신채호를 찾아가 의열단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의열단 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하는 ‘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민중이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수단은 정의롭다’고 선언했다.

‘조선혁명선언’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에서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라며 일제 식민통치의 가혹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뿐 아니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라면서 국내의 친일파나 개량주의자들의 타협노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일제를 완전히 구축하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게 혁명노선이라면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부분적인 정치적 권리를 얻자는 것이 개량주의 노선으로서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 참정권론, 자치론 등이 있었다.

단군교(檀君敎)의 정훈모(鄭薰謨)는 1922년 3월 9일 일본 왕실의 일원인 귀족원 의원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9EBF>) 공작의 소개로 일본 귀족원에 조선내정독립 청원서를 냈다. 내정독립이란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면서 조선 내정은 조선인들이 맡겠다는 주장이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1933년 일본 귀족원 의장, 군국주의가 한창이던 1941년에는 사법대신을 역임하는 인물이고, 단군교는 나철이 대종교로 개칭하고 만주로 망명해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나서자 단군교란 이름을 고수한다면서 적극 친일에 나섰던 단체였다.

참정권은 일본 정우회의 대의사(代議士) 다키 쓰네지(多木常次) 등이 1922년 3월 일본 중의원에 제출한 것으로서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의 일환으로 제청된 것이었다. 즉 식민지 조선에도 내지(內地:일본)와 같은 법령과 정책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자치론 또한 일본의 지배하에서 일부 자치라도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신채호와 의열단은 이런 노선들은 친일파와 개량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투항노선이라고 보고 있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敵)임을 선언하노라”고 규정하고 있다. 내정독립론자, 참정권론자, 자치론자 모두 자신들의 적이라는 선언이었다.

세 번째 부분에서 ‘조선혁명선언’은 외교독립론과 준비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외교독립론에 대해 “이들(외교독립론자)은 한 자루의 칼, 한 방울의 탄알을… 나라의 원수에게 던지지 못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라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준비론에 대해서도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신채호와 의열단은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라고 선포했다.

네 번째 부분에서 신채호와 의열단은 “강도 일본을 구축하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다”며 혁명이 유일 수단이라고 선언했다. 의열단의 혁명론은 민중혁명론이었다. 다음은 신채호와 의열단의 주장이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한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해야 한다.” 같은 민족, 같은 국가 내에 어떠한 차별과 억압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부분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이 갖고 있는 아나키즘적 요소다.

신채호는 ‘민중’과 ‘폭력’을 혁명의 2대 요소라면서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했는데,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偵探奴)·매국적(賣國賊), 4 적의 일체 시설물”이 그 대상이었다. 또한 ‘이민족 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균형’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대상으로 규정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면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해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끝맺었다.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자 일제는 크게 놀랐다. 간도 총영사 스즈키(鈴木安太郞)와 만주 해룡(海龍)현의 영사관 분관 주임 다나카(田中繁三)는 각각 1923년 5월과 7월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에게 ‘불온인쇄물 조선혁명선언의 반포를 개시한 건’ 등의 보고서에서 “‘조선혁명선언’이 만주 지역에 배포되고 있다”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의열단이 신채호에게 ‘조선혁명선언’의 집필을 맡긴 것은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의열단은 안창호가 탄피 제조기를 구입해 주고 김원봉·이종암 등이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불리던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 단장 김성근(金聲根)과 합숙하면서 폭탄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울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한국의 위임통치안을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요청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상해 임정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북경에 모이는데 신채호·이회영·박용만·김창숙 등이 그들이다.

이들 북경파의 일부 원로 독립운동가들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데,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이회영의 숙소로 추정하고 있다. 창립 당시 회원은 이회영·이을규·이정규·정현섭(화암)·백정기·유자명 등 6명이다. 정화암은 ‘신채호는 순치문(順治門) 내 석등암(石燈庵)에 칩거하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섭렵하면서 역사 편찬에 몰두하느라, 유림(柳林)은 성도대학(成都大學)에 재학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조직은 이회영의 자금 출자로 순간(旬刊)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다 1924년 10월 자금난으로 사실상 해체되지만 이후에도 이들은 재중국 한인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