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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김정은의 이미지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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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영진
논설위원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행보가 지구촌의 화제다. 군 작전책임자인 총참모장 이영호를 하루아침에 숙청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젊은 여성을 데리고 다녀 궁금증을 자아내더니 부인 이설주라고 전격 발표했다. 이를 두고 미 국무부 기자실에선 대변인과 기자들 사이에 “결혼식에 초청받은 미국인이 있느냐”를 두고 농담이 오가고 중국 언론들은 이설주의 한자 표기가 맞느냐를 두고 설왕설래다. 국회에선 국가정보원이 이설주의 나이와 이력을 브리핑하는 등 전 세계가 김정은 관련 소식에 목을 매는 모습이다. 모처럼 북한이 핵이나 식량난 등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가 아닌 ‘젊은 지도자’의 밝은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북한의 ‘이미지 정치’가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고나 할까.

 사실 북한의 이미지 정치는 역사와 전통이 깊다. 몇 년 전 40대의 한 탈북자로부터 ‘김일성은 고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고정하다’는 북한에선 점잖고 고상하다는 정도의 꽤 긍정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살 수 없어 탈출한 사람이 김일성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다소 의아하다는 느낌을 가졌던 기자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대중친화적인 지도자’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항일 빨치산 지도자의 경력에다 북한 건국 과정에서 노동자·농민과 현장에서 어울려가며 새로운 사회 분위기와 제도를 만들었다는 신화가 여럿이다. 1960년 보름 동안 농민들과 어울려 일하고 토론하면서 이른바 ‘청산리 방법’의 모범을 보였다는 것이나 이듬해 노동자들과 장기간 토론해 만들었다는 ‘대안의 사업체계’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또 김일성은 김정일을 어린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과 만나는 장면 등을 수시로 드러냈다고 한다. 건국 과정의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도 가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한 가장’의 모습을 함께 강조한 것이다.

 앞의 탈북자는 김일성에 비해 김정일에 대해선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섬세하고 까다로운 사람, 무서운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등이다. 이 점은 김정일이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장악하면서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이라는 점이 배경이 된 듯하다. 김일성을 수령으로 옹립하는 ‘유일지도체제’를 만들면서 북한 고위직들을 여럿 숙청하기도 했고 이른바 ‘당생활’이라는 까다로운 당원 행동규범을 만들고 보급하는 일 등을 한 탓에 비위를 못 맞추면 위험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가정적으로도 성혜림이라는 유부녀 여배우와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했고 김영숙, 홍일천, 고영희, 김옥 등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등으로 좋지 않은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이 김정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강조한 이미지는 “줴기밥(주먹밥)에 쪽잠”이라는 말대로 불철주야 국사에 매달린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 밖에 ‘효심이 강한 지도자’ ‘어려운 시기에 북한 체제를 지켜낸 지도자’라는 것 등이 북한 당국의 강조 포인트다.

 이에 비해 김정은은 여러 면에서 할아버지 김일성의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우선 외모부터 김일성과 닮은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 이른바 ‘현지지도’ 현장에서 각본에 짜인 대로 움직이지 않고 예정에 없던 장소를 방문해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을 찾아내고 지휘관을 문책했다든가, 놀이공원에서 직접 풀을 뽑으면서 관리 부실 상태를 지적하는 등 북한 주민 일상사의 어려움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부각된다.

 정책적인 면에서도 김정은은 1990년대 초 김일성의 발길을 뒤따르는 조짐이 보인다. 당시 김일성은 나진특구를 설치하고 대외무역을 강조했으며 가네마루 신(金丸信) 일본 자민당 부총재 등 유력 정치인을 초청하고 김용순 노동당 국제부장을 미국에 보내는 등 서방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김정은의 대외활동은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지만 최근 투자관계법을 대거 정비하고 해외에 경제학자와 경제관료들을 다수 파견하는 등으로 김일성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낳고 있다.

 과도한 이미지 정치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중돼 있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는 김정은의 이미지 정치는 오랜 기간 침체한 북한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법하다. 그러나 이미지 정치만으로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한 것도 사실이다. 김정은이 밝은 이미지에 걸맞은 ‘밝은 정치’를 펼 것인지는 이제부터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