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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마구 날리는 상상력, 꽉 막혔던 80년대 뚫어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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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 야구만화의 거장 허영만·이상무·이현세 화백(왼쪽부터)이 21일 열린 ‘시카프2012(SICAF2012)’의 ‘달려라 야구만화로!’ 전시부스에서 만났다. [사진 시카프 조직위원회]

포수 앞에서 튀어올라 스트라이크 존으로 빨려 들어가는 독고탁의 마구(魔球)에 “이게 말이 돼?”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던 기억, “엄지!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까치 때문에 콩닥콩닥 뛰었던 가슴 ….

1970~80년대 한국 야구만화의 거장들이 한데 뭉쳤다. 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시카프2012(SICAF2012·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전시장에서 열린 토크쇼 ‘3대 야구만화왕 마구톡!’에 참가한 이상무(66)·허영만(65)·이현세(56) 화백이다.

 이날 현장에는 세 살 꼬마부터 50대 중년까지, 다양한 세대의 야구만화 팬들이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 선 세 만화가는 “야구에는 노력과 성취, 함께하는 즐거움이 모두 담겨있다. 야구는 여전히 만화의 가장 좋은 소재”라고 입을 모았다.

 ◆야구만화밖에 없던 시절=야구를 보면 시대상이 읽힌다. 한국 야구만화는 60년대 시작됐다. 박기정의 ‘황금의 팔’, 이우정의 ‘야구왕’, 이상무의 ‘주근깨’ 등 고교야구 만화가 60~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다.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야구는 한국만화의 주요 장르가 됐다.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제7구단’ ‘대머리 감독님’ 등 히트작이 쏟아졌다.

 “권투만화를 그려도 세 페이지 이상 싸우는 장면이 들어가면 폭력적이라고 규제를 받던 시절이었어요. 야구는 비교적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 한때 야구만화 3개를 동시 연재했던 적도 있었죠.” 각 만화의 구단이름, 선수 백넘버 등이 헷갈려 고생했다는 허영만씨의 회고다.

 이현세씨도 비슷한 계기로 야구만화에 입문했다. “81년 만화가들이 당시 남산에 있던 안기부에 불려가 ‘불량만화를 그리지 않겠다’ ‘우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지 않겠다’ 등 자정선언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날 남산에서 내려오면서 어떤 걸 그려야 하나 고민하다 탄생한 게 ‘공포의 외인구단’입니다.”

 이상무씨는 개인적인 한(恨)을 꼽았다. “초등 6학년 때 학교에 야구부가 생겼어요, 근데 6학년은 선수가 못 된다는 거예요. 그때의 아쉬움 때문에 줄기차게 야구만화를 그린 것 같습니다.”

 ◆기상천외한 마구 경쟁=야구만화 인기의 핵심에는 마구가 있었다. 82년부터 소년중앙에 연재된 ‘달려라 꼴찌’에서 왼손 언더핸드 투수인 독고탁은 뱀의 몸처럼 휘어지는 ‘드라이브볼’, 바닥에 깔리면서 흙먼지를 일으키는 ‘더스트볼’, 스트라이크존으로 튀어 오르는 ‘바운드볼’ 등을 선보였다. 이상무씨는 “만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과학적으로는 책임 질 수 없다”고 답해 웃음을 안겼다.

 선수들의 목숨 건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85년 어깨동무에 연재된 허영만의 ‘흑기사’는 모든 것을 다 갖춘 포수 한동수와 백업포수 이강토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운명을 그린다. “만화를 그릴 때 야구장에서 살았어요. 대기 중인 포수들을 지켜보면서, 레귤러 포수가 다치거나 팔이 부러지지 않으면 경기에 못 나가는 이들의 운명을 다뤄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야구는 나의 꿈=야구만화는 90년대 들어 시들기 시작했다. 94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로 ‘빅리거’(박하/김일민), ‘MLB카툰’(최훈) 등 메이저리그를 다룬 만화가 등장했지만, 열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현세씨는 “요즘은 그릴 수 있는 소재가 다양해 야구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세 작가는 실제로도 야구광이다. 이상무씨는 김현수 선수의 팬이라 두산을, 허영만씨는 MBC 청룡에 신세를 졌던 인연 때문에 LG를 응원한다. 이현세씨는 “꼴찌 한화를 보면서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1위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전 한밭구장 전광판에 상영될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고 밝혔다.

 세 만화가 모두 ‘끝내주는 야구만화’ 하나 남기고 싶은 꿈도 품고 있다. 허영만씨는 “덕아웃에만 앉아 있는 노장선수가 팀이 위기에 몰렸을 때 등판해 공 하나로 팀을 구해내는 스토리를 구상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마운드의 다윗 ‘독고탁’
배트 휘두르는 ‘고릴라’
남자들의 로망 ‘까치’

◆이상무=1946년생. 72년 ‘주근깨’로 데뷔해 ‘우정의 마운드’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으로 70~80년대 야구만화 붐을 이끌었다.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고탁(그림)은 왜소한 체격을 가졌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구를 연마해 거대한 타자들을 쓰러뜨리는 영웅이었다.

◆허영만=1947년생. 74년 ‘집을 찾아서’로 데뷔해 ‘검은 글러브’ ‘K킹 강토’ 등의 야구만화를 비롯, ‘각시탈’ ‘타짜’ ‘식객’ 등 수많은 인기작을 그렸다. 85년 발표한 ‘제7구단’은 만년 꼴찌팀 샥스가 엄청난 괴력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고릴라 타자 ‘미스터 고(그림)’를 영입해 우승하는 기상천외한 야구만화다.

◆이현세=1956년생. 78년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했다. 82년에 발표한 ‘공포의 외인구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오혜성(까치·그림)을 주인공으로 하는 ‘제왕’ ‘머나먼 제국’ 등의 인기작을 발표했다. 사랑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까치는 “남자라면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작가의 희망이 담긴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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