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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여긴 꼭 들러야" 수십명 여성 등장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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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9일 오후 8시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도로를 오가던 차들이 일시에 정지했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새로 들어선 5층 높이 건물로 눈길을 돌렸다. 건물 실내에 조명이 켜지고 커튼이 일제히 걷히자 크고 작은 가방을 멘 수십 명의 여인이 등장했다. “프리티 우먼~.” 여인들은 경쾌한 영화 주제곡에 맞춰 패션쇼와 함께 댄스 공연을 시작했다. 건물 앞과 도로를 메운 300여 명의 인파는 환호하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세계 최초로’ 문을 연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Bagstage)’ 개장식 풍경이다. 지상 5층, 지하 5층으로 이뤄진 건물 안에는 ‘핸드백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시간을 간직한 오래된 가방을 관람하고, 해외 유명 브랜드의 가방을 살 수 있으며, 직접 자신의 가방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씨는 “쉽게 볼 수 없는 오래된 빈티지 백부터 최신 유행하는 핸드백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패션과 가방에 관심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감동할 만하다”고 말했다. 준비기간 3년, 전시 작품값만 18억원이 투자됐다는 지구상의 유일한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연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의 건물 외관. [사진 시몬느]

지난달 뉴욕타임스는 “서울에 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백스테이지를 소개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 또한 13일자 기사에서 “핸드백에 바쳐진 성전”이란 찬사와 함께 개관 소식을 전했다.

 세계 언론이 주목한 이 박물관을 세운 이는 ‘시몬느’의 박은관(57) 회장. 시몬느는 마이클 코어스, DKNY 등 해외 유명 브랜드의 핸드백을 생산하는 회사다. 박 회장은 이곳이 “핸드백의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겉만 화려한 핸드백을 단순히 모아놓은 곳이 아닙니다. 최종 결과물인 핸드백뿐 아니라 제작 과정까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이죠. 그래서 박물관의 이름도 무대의 뒤쪽 ‘백스테이지(backstage)’에서 핸드백을 조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핸드백 역사 500여 년 한곳에

 핸드백 박물관 4층 ‘역사관’에는 16~19세기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핸드백의 과거다. 3층 전시관에는 20~21세기 작품들이 모여 있다. 1층엔 시몬느의 자체 브랜드 ‘0914’ 매장이, 2층엔 레베카 민코프, 키쉘, 밀리 등 해외 브랜드 가방을 판매하는 매장이 있다. 핸드백의 현재인 셈이다.

 5층에선 기획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개관 기념 특별전의 주제는 ‘이탈리아의 색채’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펜디, 프라다, 구찌, 살바토레 페라가모, 푸치, 돌체&가바나 등의 브랜드가 세계 최초의 핸드백 박물관 개관을 축하하며 보내준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를 둘러보던 대학생 이지은(23)씨는 “이탈리아 명품백 하면 너무 비싸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화려한 자수와 개성 있는 일러스트로 꾸며진 가방들을 보니 열정적이고 유쾌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친근함이 든다”고 말했다.

 ‘핸드백의 미래’는 지하 2개 층에 집중돼 있다. 여기엔 신진 가방 디자이너들을 위한 창작 스튜디오 겸 매장이 들어서 있다. 후진 양성을 위해 무료 임대할 계획이다. 같은 층 한쪽에는 핸드백 제작 체험공간이 있다. 일반인들이 직접 가방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 3층엔 가죽 등 500여 종의 가방 소재가 전시돼 있다. 시몬느가 내로라하는 브랜드의 가방들을 제작하며 축적한 귀한 재료들이다. 박 회장은 “이 공간을 통해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더 많은 열정을, 일반인이라면 ‘미래의 스타 디자이너’가 될 꿈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준비기간 3년 … 시대 대표하는 작품 모아

16∼19세기 핸드백이 전시돼 있는 4층 역사관. 주머니나 향낭·지갑 등으로 쓰인 오래된 가방들을 볼 수 있다. 맨 오른쪽 진열장의 윗줄 왼쪽 핸드백이 소장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50년대 이탈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실크 주머니’다. [사진 시몬느]

 핸드백 박물관은 건물 모양도 독특하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게 영락없이 둥근 손잡이가 달린 핸드백을 옆으로 돌려놓은 모양새다. 말하자면 백스테이지 건물 자체가 ‘세상에서 제일 큰 핸드백’인 셈이다.

박 회장이 박물관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핸드백 제작에 평생을 바친 사람의 자부심, 그것이다. “핸드백 제조회사를 차린 지 25년, 그 이전의 해외영업까지 합하면 33년째 핸드백을 만들었죠. 거래처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내게 물어봐요. ‘핸드백은 언제 처음 등장했죠’ ‘여자들은 왜 핸드백을 좋아하죠’ 등. 이런 모든 질문에 답을 줄 만한 박물관이 있으면 좋겠구나 생각했죠. 회사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게 3년 전입니다.”

 박 회장은 박물관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콘텐트(핸드백)’를 찾는 일이었다고 했다. “핸드백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거기에 합당한 작품을 찾아내 제대로 전시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죠.”

수소문 끝에 찾아낸 실력자가 바로 주디스 클라크다.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를 지낸 그는 복식사와 박물관학 전문가다. 현재는 영국 런던예술대 산하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LCF)’에서 패션 전시기획을 가르치고 있다. 클라크 교수는 “핸드백의 역사는 곧 여성의 역사”라며 “크기는 작지만 그 안에는 장식 예술의 역사, 패션 실루엣의 변화, 여성을 둘러싼 사회환경의 변화 등이 모두 녹아 있다”고 말했다.

백스테이지 전시 기획을 맡은 뒤 그는 350여 점의 작품을 수집했다. 작품값만 100만 파운드(약 17억9000만원)에 달한다. 영국의 유명 경매회사 소더비를 비롯해 전문 수집가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클라크 교수는 “특정 시기에만 집중되지 않도록 적절히 시대를 안배하고 ‘꼭 언급해야 할’ 대표작만 골라 모으는 과정은 인내와의 싸움이었다”고 술회했다. 핸드백은 지금까지 패션에 부수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돼 왔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은 걸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오직 핸드백을 위하여

 박물관에서 핸드백만큼이나 눈에 띄는 건 마네킹이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핸드백만 도드라져 보이도록 맞춤 제작한 것들이다. 엄지와 검지만 살짝 오므리거나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팔꿈치만 약간 구부린 것 등 포즈도 색다르다. 클라크 교수는 “핸드백의 모양이나 소재도 유행이 있었지만 핸드백을 드는 방법도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고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여성들이 핸드백을 ‘직접’ 들고 다닌 건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다. 이전까지 핸드백은 귀한 액세서리였다. 그 때문에 귀족 등 특정 계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 들고 다닐 때 헝겊 주머니 정도를 사용했을 뿐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오래된 핸드백은 155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크 주머니. 돈이나 편지, 반짇고리 등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층 역사관의 작품 진열장은 모두 영국에서 주문 제작했다. 짙은 밤색장에는 핸드백 잠금쇠 모양을 본뜬 장식이 달렸다. 진열장 장식 같은 세부적인 것까지 핸드백이란 주제로 통일성 있게 꾸민 결과다. 여기에는 19세기 초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이 등딱지’ 핸드백 등이 소장돼 있다.

‘핸드백만을 위한 최초의 공간’인 백스테이지는 학술적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예일대 출판부는 다음달 1일 『핸드백, 박물관이 되기까지』라는 책을 발간한다. 클라크 교수가 ‘백스테이지’라는 핸드백 박물관을 개관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담아 관련 전문가와 함께 엮어낸 책이다. 박물관 전시품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곁들여졌다. 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핸드백의 모든 것: 시몬느 핸드백 뮤지엄』이다.

사회를 비추는 거울, 핸드백

 “어, 이건 알렉산더 매퀸의 옷이네.” “이건 비비언 웨스트우드가 루이뷔통을 위해 만든 거래.”

20~21세기 작품들을 전시한 공간은 작품 설명을 읽는 사람들의 ‘조용한 감탄’으로 가득했다. 패션과 핸드백은 불가분의 관계다. 시대에 따라 패션 경향이 바뀌면 핸드백의 디자인도 변화한다. 그래서 3층 전시실에는 ‘시대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 비비언 웨스트우드, 마틴 마르지엘라 등이 만든 옷과 핸드백이 함께 전시돼 있다.

이 공간에는 개관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끈 프랑스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도 전시돼 있다. 빨간색 악어가죽으로 만든 이 백의 가격은 1억원을 넘는 다. 1998년 생산된 것으로 박물관이 구입한 것 중 가장 비싸다. 클라크 교수는 “보석으로 치장된 백들도 많지만 이것은 훨씬 비싼 가격에 사야만 했다”며 “요즘 시세가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버킨백은 작고한 에르메스 5대손 장 루이 뒤마가 가수 제인 버킨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1984년 첫선을 보인 뒤 지금까지도 ‘최고급 핸드백’의 대명사로 통한다. 국내에서 사려면 일단 주문자 대기 명단에 이름부터 올린 뒤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렇게 어렵게 구한 버킨백이 전시장 안에선 다른 핸드백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크기의 유리장 안에 놓여 있다는 게 흥미롭다. 클라크 교수는 “버킨백 구입 가격은 현대 여성들이 얼마나 그것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일 뿐”이라며 “박물관 안에는 그보다 역사적인 중요성, 장식 예술로서 가치가 높은 작품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사실 이날 개장 행사 에서 버킨백 다음으로 관심을 끌었던 건 지하 1층 기념품숍에서 파는 ‘에코백’이었다. 가격은 2만5000원. 클라크 교수의 말처럼 핸드백의 가치는 가격이 아니라 현 시대 여성들의 감각과 얼마나 호응하는가로 정해진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물관 만든 시몬느 박은관 회장

핸드백에 미쳐서 25년
재료 노하우 세계 최고
독자 브랜드 0914 시작

시몬느 박은관 회장은 “세계 최고의 장인 정신으로 핸드백을 만들고 있으니 우리가 ‘세계 최초 핸드백 박물관’ 하나쯤은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 개관 준비에 분주한 그를 지난주 경기도 의왕 시몬느 본사에서 만났다.

●핸드백 박물관,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 같다.

 “사업을 하며 내가 만나는 이들이 있다. 모두 핸드백에, 말하자면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과 대화할 때마다 핸드백의 역사가 자주 화제에 올랐다. 회사 설립 25주년을 기념 삼아 뜻 깊은 작업을 하고 싶어 계획했다.”

●서양 작품 위주인데.

 “처음 구상은 ‘동양과 서양의 만남’ 같은 걸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을 후원해 『우리 전통 가방』이란 책도 지난해 펴냈다. 그런데 아직 박물관을 채울 정도는 아니다. 짧게는 3~5년, 길게는 10년 안에 동양의 핸드백 문화도 집대성할 계획이다.”

●전시품 확보와 전시 기획이 꾸준한 과제일 텐데.

 “그래서 나를 포함해 6명의 박물관 후견인, 즉 트러스티(trustee)를 구성했다. 전시를 기획한 주디스 클라크, 미국의 유명 패션학교 FIT의 박물관장인 발레리 스틸도 멤버다. 각계 전문가와 함께 항상 신선하면서도 권위가 있고 재미도 있는 박물관이 되도록 꾸려갈 계획이다.”

●시몬느라는 회사 홍보를 위해서 박물관을 만든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을 수 있다.

 “남의 브랜드 가방만 25년 만들었다. 시몬느에서 일하는 핸드백 장인들의 경력을 모두 합치면 2700년이 넘는다. 수십 개 브랜드 가방을 만들어 줬으니 무수한 재료를 수급하고 다루는 노하우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우리가 디자인도 해 줬으니 디자인 실력은 말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그래서 이제 우리 브랜드 ‘0914’도 시작했다. 박물관이 이런 사업에도 물론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핸드백의 미래’다. 모쪼록 핸드백 박물관에 오는 관람객 누구든 머리에, 가슴에, 손에 핸드백을 하나씩 들고 나갔으면 좋겠다. 가방 제작 체험관과 소재관에선 핸드백에 대한 지식(머리)이 갖춰질 것이다. 전체 작품을 훑어 보며 가방 디자이너의 꿈(가슴)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진짜 가방을 사갈 수도 있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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