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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이야기 ⑨ 1년간 뉴욕 생활 신경숙, 8개월 만에 다시 찾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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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여행은 낯선 세계로의 진입만은 아니다. 그리운 것들과의 재회의 시간이 내겐 여행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렇게 흘러가겠지’를 뒤집는 일은 인생에서 수시로 발생한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새로운 것이 발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다.

뉴욕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발생할 줄이야. 1년을 뉴욕에서 방문객으로 지내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내 책상에 앉을 때마다, 맨해튼 52가 8애비뉴에 있던 20층 원룸아파트에서 내가 쓰던 작은 2인용 탁자 모서리에 닿곤 하던 내 팔꿈치 감각이 떠오르곤 했다. 그 탁자에 발을 올려놓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마천루의 불빛들을 내다보곤 했던 1년 전의 내가 타인처럼 그립게 떠오르곤 했다.

어디선가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소설가 신경숙(오른쪽)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거리 자체가 공연장이고 미술관인 맨해튼에서의 산책은 흐트러진 생각들을 모아준다.

8개월 만에 다시 뉴욕과 다시 재회했을 때 공항에서 탄 택시가 맨해튼으로 들어서는데 나도 모르게 콧날이 싸했다. 여장을 풀고 내 발걸음이 찾아간 곳은 내가 살던 곳이었다. 서른 두 개의 블록을 걸어 내가 도착한 내가 살았던 곳. 그저 그쪽 빌딩을 한번 올려다보고 올 생각이었는데 20m 전부터 나를 알아본 도어맨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쁨 같기도 하고 서글픔 같기도 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어맨은 내가 그곳을 떠난 지 8개월이나 지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해브 어 굿 데이(Have a good day).” 도어맨의 인사에 밝게 미소까지 지으며 떠난 지 8개월이 된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그대로 로비를 지나 익숙한 우편함을 바라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가 항상 내리던 20층에 내려 저절로 코너를 돌아 내가 살던 집 문 앞에 섰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저 안에.

우리가 뉴욕을 말할 때 등장하는 곳은 사실은 맨해튼이다. 맨해튼은 뉴욕 주에서도 가장 작은 면적인데 우리가 뉴욕이라고 말할 때의 거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세계 상업과 금융 시설뿐 아니라, 뮤지컬·오페라·패션·음악·미술, 게다가 세계의 다양한 음식이 모여 있는 레스토랑들…. 세계 문화가 그곳에서 발생하고 그곳에서 소통된다.

맨해튼 거리는 시간과 요일에 따라 휑함과 분주함이 교차한다.

나에게 맨해튼이 편안했던 것은 나처럼 길눈이 어두운 사람도 주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였다. 게다가 거리에 나가보면 모두들 어디선가 모여든 이방인들 같았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 지하철 안에서든 길거리든 공원이든 카페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없는지. 모두들 1인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듯했다.

뉴욕의 실내로 들어가 보기 전에 뉴욕의 첫 인상은 세계인의 정류장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만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내 책을 만드는 에디터에게 “한국에서 뉴요커라고 하면 아주 멋쟁이로 통하고 특히 패션 스타일이 좋은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데 내 눈에 그런 사람들이 잘 안 보인다. 한국에 소개되는 뉴요커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물었다. 그녀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마도 그들은 실내에 있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미술관이나 공연장들이 그녀가 말하는 실내에 속한다면 나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글=신경숙(소설가), 사진=이병률(시인, 여행작가)

글=신경숙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편 ‘겨울우화’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외딴방』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생산하고,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밀리언셀러 『엄마를 부탁해』는 판권이 전 세계 33개 국에 수출됐으며, 맨 아시아 문학상도 수상했다.

사진=이병률 40만 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 여행 에세이 『끌림』의 저자다.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을 출간했다. 최근 또 다른 여행 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출간했다.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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