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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으면 절해고도 문 열면 세계중심 … 내 책상 놓아두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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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뉴욕의 겉모습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실망하기까지 했다. 도착한 첫날 밤에 나는 시차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119 구급차 소리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5애비뉴 쪽으로 나가 센트럴파크 쪽으로 나갔을 때 나를 반긴 건 불행히도 지독한 말똥 냄새였다. 매일 아침마다 센트럴파크에서의 조깅을 생각했던 내게 센트럴파크가 보낸 첫인사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말똥 냄새였다. 그 냄새가 센트럴파크의 강렬한 인상이 돼버리는 통에 아침마다 조깅은 무산되었다. 그래서 뉴욕에 머무는 1년 동안 아침에 센트럴파크에 나가보는 일은 눈이 내린 겨울날 아침에 더 많이 이루어졌다.

휘황 찬란한 모습도 수수한 모습도 맨해튼의 진짜 얼굴이다. 첼시 한켠에 있는 낡은 창고들은 갤러리로 변신을 한 뒤 세계 중심을 이끄는 미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길거리는 여행자들로 소란스럽고 북적이고 더러웠다. 200L 용량은 될 것 같은 검은 비닐로 된 쓰레기봉투 속에 가득 가득 담긴 쓰레기들이 길거리에 산더미만큼 쌓여있는 곳도 허다했다. 지하철역은 어둡다 못해 쥐가 돌아다니고 빗물이 새고 청소를 하지 않아 쓰레기들이 돌아다녔다. 오래된 지하철은 걸핏하면 수리 중이어서 주말이면 노선이 끊기곤 했다. 서울 같으면 그야말로 뉴스로 등장할 일이 주말엔 운행이 변경된다는 안내 메시지 한 장이 달랑 붙어있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 지하철을 타는 게 싫었기 때문에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도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뉴욕이라는 첨단 문화도시 풍경 속에는 늘 걷는 사람들이 있다. 20블록 30블록쯤은 거뜬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까? 뉴욕의 거리를 걷다 보면 수준 높은 공공미술과 마주친다. 내가 55가의 6애비뉴에 있는 로버트 인디애나의 ‘러브(LOVE)’를 만난 것도, 어느 금융회사의 건물 로비에서 토머스 하트 벤튼의 벽화를 만난 것도, 그냥 걷다가였다.

다리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다리미 빌딩이라고 불리는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 일대는 하루종일 술렁인다. 이 빌딩을 중심으로 여러 길들이 나눠지고 모아진다.

복잡한 타임스퀘어에서 환승을 할 일이 있었는데 길을 잃어버려 헤매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행복한 눈물의 리히텐슈타인의 벽화 앞에 서 있기도 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모마)이라든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같은 곳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를 전시장 삼아 전시회가 수시로 벌어지기 때문에 그냥 걷다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을 시시때때로 만나게 된다.

걷는 곳이 첼시 지역일 때는, 몇 걸음마다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한나절을 꼬박 갤러리를 누비고 다니다가 고가 철도공원 하이라인(The High Line) 위로 올라가 보면 그 모던함에 그만 감탄하고 만다. 원래는 화물열차가 지나다니는 철길이었는데 80년대부터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음산하게 방치되어 있던 곳을 공원으로 개발한 곳이다. 철길은 그대로 있고 남북으로 30개가 넘는 블록에 걸쳐 있기 때문에 걷기에도 쉬기에도 적절한 곳인 데다 하이라인에 올라 걷는 길은 블록마다 같은 풍경이 없다. 버려진 철길이었다는 것도 이따금씩 노출된 철로로 확인될 뿐 마음이 안정되는 그 세련됨에 아! 뉴욕! 하게 된다. 철길 사이에 한껏 심어놓은 야생화들 사이에서 각각 다른 블록의 맨해튼을 내다보면 오래된 익숙함과 방금 발생한 낯섦이 서로 만나 합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날의 할인티켓을 받기 위해 일찍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객들. 당당하고도 지루해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이라인의 이쪽이든 저쪽이든 걷는 것 자체를 잊어버릴 만큼 홀려 있다가 다시 거리로 내려오면 길거리 아티스트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거리의 악사들 실력이 수준급이어서 1달러만 놓기가 미안해 지갑을 다시 열곤 했다. 한적한 곳이면 벽에 기대어 온전히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다. 뉴욕 거리의 악사는 떠돌이가 아니다. 뉴욕시에 공식적으로 원서를 내고 오디션에서 십대 일의 경쟁률을 통과한 악사들이라 그 실력이 수준급이다.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며 음악당인 셈이다.

뉴욕이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상당한 값을 지불해야 입장할 수 있는 미술관과 공연장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입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뉴욕에 머물고 있다면 누구나 그곳에서 발생하는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적 뒷받침과 문화 기부 덕택이다. 12세 미만의 어린이들은 어려서 학생은 학생이어서 노인은 노인이어서 무료 입장이 가능하고, 일반인에게도 그 기회를 마련해주는 곳이 뉴욕이다.

금요일 오후 ‘모마’ 앞을 지나다 보면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매주 금요일 4시 이후부터 문을 닫는 시간까지 평일에 20달러나 되는 입장권을 사지 않고 무료 입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료 입장의 자격은 없다. 선착순이기 때문에 줄을 서 있으면 된다.

링컨센터의 오페라 오케스트라석의 티켓이 250달러가량이니 일반인에게는 비싼 값이다. 이 자리를 단돈 20달러에 구할 수 있는 ‘러시 티켓’이 매일 200장씩 나온다. 50장은 노인들이 줄을 서지 않아도 되도록 무조건 노인들을 위해 제외해놓고 나머지 150장을 오후 6시부터 선착순으로 한 사람에게 두 장씩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링컨센터의 오페라극장 지하에 내려가 보면 이 표를 구하기 위해서 오후 1시부터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선착순이기 때문에 ‘라보엠’ 이나 ‘라트라비아타’ 같은 인기 오페라는 오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하기도 한다. 그 풍경 또한 뉴욕의 아름다운 한 풍경이다. 낚시의자 같은 의자를 들고 나와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담소를 나누다 앞뒤 사람과 서로 사귀어 친구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5시쯤 되면 안내원이 내려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티켓을 구할 수 있는 표를 나눠주고 매표구 앞으로 안내한다.

20달러를 내고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아그네스 바리스’ 라는 사람의 문화기부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무척 가난했다. 어린 시절에 우연히 오페라를 보게 되었는데 그만 오페라에 흠뻑 매혹되어 버렸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마음껏 오페라를 볼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을 품고 성장한 그녀는 오페라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성공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이사회의 이사가 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매일 200석의 오케스트라석의 요금을 대신 내주는 기부를 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곳.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철길을 살려서 산책로를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어 놓았다. 뉴요커들의 동맥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는 하이라인 파크.

8개월 만에 재회한 뉴욕에서 첫 일이 옛집 쪽으로 걸어가 본 것이었듯이 틈이 날 때마다 줄곧 내가 하는 일은 내가 다녀본 장소들을 다시 가보는 거였다. 예전에 걸었던 아는 길, 밤 산책을 즐기던 공원, 회원권을 만들었던 서점, 망고와 아보카도를 즐겨 사던 마켓, 예술영화 전용 극장, 일본 라면집, 중국식 게볶음집, 세 가지 스파게티를 한 접시에 담아주던 레스토랑…. 나는 그 장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갔지만 나를 따라오지 못한 내가 거기 남아 있었다.

나는 낯선 곳에 가면 그곳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소를 옮겨 다니며 글을 쓰는 일, 카페 같은 곳에서 글을 쓰는 건 내 세계가 아니다. 문을 닫고 들어앉으면 완벽히 혼자가 되지만 문만 열고 나서면 세계의 중심과 통하는 도시 뉴욕에 내 책상을 하나 놓아두고 싶어졌다.

8개월 만에 재회한 뉴욕은 어느새 나에게 그런 곳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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