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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17~18세기 日, 조선 배우려 '안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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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조선·일본 필담 모습 나고야에서 조선통신사와 일본 전문가들이 필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 그림은 나고야 명소를 소개하기 위해 18세기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에 실렸다.

1764년 2월 일본 나고야. 조선통신사 의원 이좌국이 일본 바쿠후(幕府·무사 정권) 의관(醫官) 야마다 세이친과 마주 앉았다. 세이친이 붓을 들어 한자로 질문을 적었다. “인삼 재배하는 방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좌국이 붓을 건네받아 답변을 썼다. “인삼은 원래 제조법이 없습니다. 일본 의원들은 늘 그걸 설명해 달라고 하는데, 사실을 잘못 들은 듯합니다.”

 17~19세기 조선통신사 수행원들과 일본 전문가들은 이런 필담(筆談)을 자주 나눴다. 말은 안 통했지만 같은 한자를 썼기 때문에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주로 일본 전문가가 묻고 조선 수행원이 답하는 식이었다. 특히 인삼 관련 문답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선 인삼의 약효에 관심이 많았지만, 풍토가 안 맞아 재배를 못했다. 일본 의관들은 인삼 재배법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러나 수행원들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인삼 재배법은 당시 조선의 국가기밀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필담집 아이노시마(藍島) 창화필어(唱和筆語). 아이노시마는 쓰시마와 규슈 섬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책은 18세기 아이노시마에서 있었던 필담을 기록한 것.

 최근 연세대 필담창화집 연구단(단장 허경진 연세대 교수)은 일본의 필담집 178권 전부를 번역했다. 필담집 전수 번역은 한·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페이지 수 3만1550쪽, 글자 수 210만360자에 이른다. 필담집엔 17~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사회·경제·문화적 교류가 세밀하게 그려져 학문적 가치가 높다. 조선의 의술 ·문예 등 다양한 분야가 폭넓게 거론된다. 예컨대 일본의 필담집 『상한필어』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세이친이 조선통신사 제술관 남옥에게 부탁한다. “저를 위해 언문(諺文·한글)을 써주십시오.” 이에 남옥은 한글을 적기 시작했다. ‘ㄱㄴㄷ (…) 가갸거겨고교그기…’ 남옥이 한글 발음을 알려주자 세이친은 가타카나(일본 문자)로 발음을 받아 적었다. 경남대 김형태(국문과) 교수는 “일본 지식인들의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한글을 쓰고 읽는 데까지 확산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1719년 일본 시인 기노시타 란코는 당시 유행하던 ‘이로하’란 민요를 한글로 기록해 필담집에 실었다.

일본판 조선어 교재 교린수지(交隣須知)는 18세기 아메노모리 호슈가 쓴 조선어 교재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조선어 교재가 팔리기도 했다.

 필담집에 따르면 당시 조선통신사는 일본인들에게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외교사절단으로 인식됐다. 300~500명 규모의 조선통신사를 2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수행했다. 조선통신사를 대접하는 데 바쿠후 1년 예산의 4분의 1인 100만 냥이 들었다고 한다. 1748년 일본 의관 노로 지쓰오가 “이 옥호(玉壺) 한 병은 아란(阿蘭·네덜란드) 사람들이 해마다 와서 바치는 포도주”라며 조선 의원 조숭수에게 서양 와인을 선물하는 대목도 필담집에 담겨 있다.

 조선통신사와의 필담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특급정보’로 통했다. 조선통신사의 숙소 앞은 선진 기술과 학문에 대해 자문을 하려는 일본인들로 늘 북적였다.

 ◆한·일 공동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연세대 필담창화집 연구단은 올 연말까지 필담집 번역본(총 40권)을 완간할 예정이다. 책은 한글·일본어·영인본 등으로 구성된다. 출판이 완료되면 한·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는 “향후 일본으로 역수출도 가능한 연구 결과물이다. 번역을 진행하는 동안 필담집 50권을 추가로 수집했다”고 말했다.

한영익 기자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조선통신사 일행이 17~19세기 일본을 방문해 일본 유학자 등과 한문 필담으로 나눈 대화 내용, 주고받은 글·그림 등을 엮어 펴낸 책. 주로 일본에서 출판됐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쓴『사행록(使行錄)』과 함께 조선통신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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