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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미키마우스에 밀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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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5일 실각한 북한 이영호 군 총참모장(왼쪽 사진)과 11일 TV로 방영된 모란봉악단의 미키 마우스 댄스(오른쪽 사진). 북한의 변화를 예고하는 듯한 대조적인 모습이다. [중앙포토]

미묘한 변화의 신호들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은 국내 인민들 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재일조선인총연맹(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평양 특파원은 미키 마우스와 북한판 ‘소녀시대’가 등장했던 모란봉악단 공연 이후 평양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북한은 지난 6일 김정은이 관람한 이후 “주민들에게 보여주라”고 지시해 이 공연을 11일 저녁 TV로 녹화 방영했다. 공연에는 영화 ‘록키’ 주제가와 ‘마이웨이’도 연주됐다. 북한 여성들에게 금기시됐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등장하고,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전자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도 전파를 탔다. 중국이나 해외에 진출한 북한 식당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공연 내용이 북한 주민들 속으로 여과 없이 파고들어갔다.

 북한 스스로 ‘반가운 충격’이라고 할 만큼 이전에 없던 모습이다. 조선신보는 “세계를 향하며, 세계와 교감하는 ‘열린 음악정치’”라며 “무대 위에 펼쳐 보인 것은 ‘세계 속의 조선’”이라고 규정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 북한의 변화가 감지되는 대표적인 예다.

 이외에도 김정은의 충격요법적 행보는 계속 이어져왔다. ‘주민 속으로’라는 이미지를 퍼트리기 위한 의도로 분석된다. 북한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겠다고 했던 지난 4월엔 과자 5000만 봉지를 생산하고, 김정은은 평양시 건설사업에 2000만 달러를 하달했다고 한다. 노후한 평양시 건축물 재건축과 평양~남포 고속도로(청년영웅고속도로) 주변에는 신도시 건설도 추진 중이다. 특히 김정은이 국가 지도자로선 격에 맞지 않아 보일 정도로 놀이공원에 잡초가 났다고 역정을 내는가 하면, 예고 없이 평양 순안공항을 방문하고 예정에 없던 동선(動線)으로 움직여 참모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김정일의 경제회복 노력을 부각시키며 주민 복지에 신경 쓰는 모습을 과시하는 것이다.

 대외 경제정책에도 변화 조짐이 나타난다. 지난 5월 해외투자 업무를 하는 합영투자위원회의 대외 홍보용 자료엔 전기료(0.033유로/㎾h), 수도세(0.065유로/㎥), 사무실 구입비(평양 70~150유로/㎡), 사무실 임대료(1.38유로/㎡) 등 구체적인 액수가 적시됐다. “투자 조건을 우대해 줄 테니 투자하라”며 ‘묻지 마’식 투자를 요구했던 과거 모습과 다르다. 또 과거 5장 내외였던 계약서를 20장이 넘을 정도로 자세하게 작성하고 있다. 독일·말레이시아·중국·러시아 등 30개국 38개 도시에 무역대표부를 신설하고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경제 개선 조치나 대외 협력 확대 등 ‘북한식 개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 비중은 점점 커져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7개월 만에 북한 내부에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현재로선 북한이 김정일 시대의 선군(先軍)정치를 포기했다고 단언할 근거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유학파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실용노선으로 전환할 여지는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봉조(전 통일부 차관) 도산통일연구소장은 “선군이 경제에 수렴되는 ‘용군(用軍)’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점차 선경(先經)이나 선민(先民)으로 넘어가는 수순”이라고 전망했다.

 예컨대 북한이 중국 장쑤(江蘇)성 장인(江陰)시 화시(華西)촌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이곳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중국이 공업·무역 강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화시촌은 ‘중국 농촌 개혁의 성공모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화시촌은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인센티브 기법을 도입해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극대화했다. 그 결과 30여 년 만에 철강·섬유·해운 분야에 진출하며 막대한 부를 일궜다. 지난해 완공된 화시촌 룽시(龍希)빌딩은 화시촌의 성공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하룻밤 숙박료가 9만9999위안(약 1780만원)인 특실을 비롯해 800개 객실을 보유한 5성급 호텔이 영업 중이다. 북한 정부가 이곳을 연수지로 삼았다는 데 전문가들은 의미를 찾는다.

 지난달에는 별도의 북한 대표단이 화시촌을 시찰했다고 한다. 후진적 농업국가인 북한이 화시촌 모델을 배우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5월 싱가포르 방문도 반추해 볼 사안이다. 그는 당시 김정은의 민생 중시 방침을 적극 부각했다고 한다.

 이런 흐름에서 15일 이영호 총참모장의 해임을 선군정치에서 민생 중시로의 전환 가능성을 엿보게 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전문가가 적잖다. 이봉조 소장은 “그동안 군부가 외화벌이와 지하자원 개발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려 왔지만 이제 그 특권을 내각으로 일원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정은이 4·15 연설에서 “우리 소중한 인민의 허리띠를 다시는 졸라매지 않겠다”고 한 대목에 대해 “경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최근 화·금 정례 간부회의에서 “내겐 총알보다 쌀알이 더 소중하다”고 한 발언을 소개했다. 그는 “김정은이 아버지와 다른 노선을 갈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라며 “유훈인 선군정치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인민 생활 향상을 위한 노력을 배가해 개혁·개방 쪽으로 갈 수 있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장세정·이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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