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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은 없지만 당신은 살인자’ 10시간 들은 배심원 9명 전원 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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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아까 피고인이 경찰수사 당시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무심코 손날로 목을 치는 행동을 시연한 것 기억나십니까? 바로 어제 제보자 이모(34·여)씨가 증언한 피고인의 동료 조모(31·사망 당시)씨 살해 방식과 일치하는 손날치기였습니다. 피고인은 이씨와 동거할 당시 ‘급소를 손날로 때려 피해자를 구덩이로 떨어뜨린 뒤 생매장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게 살인의 결정적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 최동렬) 심리로 진행된 ‘시신 없는 살인사건’의 국민참여재판은 자정 무렵까지 장장 10시간 동안 계속됐다. 재판 막바지에 검사는 9명의 배심원 앞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배심원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피고인 박모(41)씨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저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분명히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씨를 찾아올 수 있다”며 “시체가 없는 상황에서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으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고 끝까지 억울함을 주장했다.

검찰이 내세운 증거들은 간접·정황 증거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배심원 몇 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16일부터 이날까지 사흘 동안 배심원들은 2008년 4월 용인에서 발생한 생매장 사건을 놓고 치열하게 전개된 검찰과 박씨 간의 공방을 지켜봤다. 굴착기 운전사 박씨가 동료 조씨를 생매장해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조씨의 유족과 당시 수사경찰관들, 박씨의 동거녀였던 이씨 등이 증인으로 나와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지만 공방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진실이 어느 쪽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검찰은 법정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동거녀가 “박씨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제보한 박씨 본인의 살인 자백과 ▶경찰수사 때의 박씨의 범행 자백 ▶박씨가 2008년 4월 조씨의 체크카드로 차량을 샀다가 보름 만에 되팔고 중국으로 출국한 점 ▶박씨가 조씨에게 1290만원의 채무를 진 사실 ▶당시 차량 트렁크에 있던 조씨의 옷가지를 태운 사실 등이다.

 그러나 박씨는 조목조목 반박하며 조씨가 살아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조씨와 중국 위조여권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내가 조씨에게 가짜 중국여권을 만들어줬다. 조씨는 중국 등지로 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살인 자백에 대해 “경찰의 강압과 회유 때문이었다”며 “동거녀가 위자료를 노리고 거짓 제보를 한 것”이라고 했다.

 배심원단의 결론은 19일 오전 3시가 되어서야 나왔다. 배심원 9명은 만장일치로 박씨의 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라고 판단했다. 이를 참조해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매장 장소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핵심 증언의 신빙성이 높고 가까운 사이인 피해자가 사라졌음에도 피고인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은 점 등으로 볼 때 유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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