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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만원 써 고쳤다는 창문 … 가보니 40년 전 그대로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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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A중·고교의 방범창과 창틀이 때가 시커멓게 낀 채 휘어져 있다. 이 학교는 지어진 지 40년이 넘었지만 시설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유정 기자]

서울 강북의 A중·고는 40여 년 전 개교 당시 설치했던 창틀을 아직도 쓰고 있다. 창틀은 보통 25년 이상 지나면 교체해야 한다. 때가 낀 알루미늄 창틀은 휘어지고 뒤틀려 힘을 줘도 잘 열리지 않는다. 16일 등굣길에 만난 한 학생은 “낡은 창문이 운동장 쪽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며 “학생들이 늘 불안해 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는 서류상으로는 3년 전 8000만원을 들여 창호를 교체한 것처럼 돼 있다. 그러나 건설업자에게 공사비만 지불한 채 실제 공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감사를 통해 학교 관계자들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사라진 공사비 일부가 비자금 조성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며 “몇 년 전만 해도 공사비의 10~15%는 학교에 리베이트로 돌아가는 게 관행이었다”고 말했다.

 학교 시설이 열악한 원인 중 하나는 예산 부족이다. 하지만 취재팀이 올 5월 감사원이 발표한 학교 시설 확충 및 관리실태 보고서와 서울시교육청의 최근 감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낭비되는 예산도 많았다. 이재림 한국교원대 교수는 “낭비되는 시설 예산만 줄여도 학교 환경이 많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시설 예산을 둘러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배정된 예산을 교장·교사들이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서울 A고는 2010년 교실을 고칠 예산 2300만원으로 교원 휴게실을 리모델링했다. 안마의자·침대·발 마사지기도 들여놓았다. 특별교실 신축 예산으로 법인이사장실을 만들거나 탈의실을 만들 예산으로 교장실을 증축한 경우도 있었다. 감사원 관계자는 “예산 집행 과정에 대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교과교실제와 과학실 현대화 사업 등 여러 사업이 계획 없이 중복 추진되면서 같은 시설을 두세 번씩 고치는 사례도 있었다. 경기도 B고는 2009년 9000만원을 들여 과학실 두 곳을 리모델링했다. 하지만 1년 뒤 교과교실제를 시행하면서 학생들이 오가기 불편하다며 과학실을 다시 옮겨 1700만원을 낭비했다.

 이처럼 돈이 필요한 곳에 쓰이지 못하는 이유는 예산을 심의·결정·감독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다. 감사원 조사 결과 16개 시·도교육청 중 12곳은 시설 예산을 배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없었다. 사업마다 담당 부서가 달라 교육청 내 5~6개 부서가 나눠 담당한다.

 지방의회 의원들이 로비에 휘둘려 예산을 배정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지방의원은 “연말이면 교장과 학부모들로부터 ‘우리 학교 시설부터 고쳐달라’는 로비가 많이 들어온다”며 “시설의 노후 여부에 관계없이 예산이 나가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예산을 둘러싼 로비가 뒷거래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2008년 조병인 당시 경북교육감은 사학재단으로부터 기숙사 신축에 따른 예산 지원 등의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 교육감직을 사퇴했다.

 전문가들은 예산 분배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상민 한국교육환경연구원 연구실장은 “예산 편성 때 로비나 비리가 개입할 수 없도록 객관적인 개·보수 기준을 마련하고, 학교별로 장기적인 시설 보수계획을 세워 낭비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문진 서울시의원은 “정부·교육청·지자체가 집행하는 시설 예산을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중복 투자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한길·이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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