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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터키 ‘그랜드 바자’의 한 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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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논설위원

“다음 휴가엔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에 가고 싶어.”

 -터키?

 “아니,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라니까.”

 -이스탄불이 터키에 있는 도시잖아.

 “이스탄불이 터키에 있는 거야?”

 지난주 친구와 이런 ‘사오정’ 같은 대화를 나눴다.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패션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휴가 얘기를 하던 중에 나온 말이다. 그랜드 바자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400년도 넘은 큰 재래시장이다. 터키 고유의 그릇·카펫·장신구·옷·잡화 등을 판다. 최근에 이곳을 다녀온 후배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무지하게 넓고, 복잡하고, 관광객이 많고, 바가지가 난무한다”고 정리했다.

 어쨌든 친구가 무턱대고 가고 싶다기에 물었다. “터키에 있는 것도 모르면서 그랜드 바자는 어떻게 아느냐”고. 친구가 대답했다. “요즘 뉴욕 패션피플들 사이에 휴가 때 그랜드 바자에 가자는 게 유행이야.” 뉴욕 패션피플들이 느닷없이 ‘그랜드 바자’에 꽂힌 이유를 캐물었더니 최근 뉴욕에서 출판된 『그랜드 바자』라는 럭셔리 화보책 덕분이라고 했다.

 이 오래된 터키의 재래시장은 주로 에르메스·샤넬·루이뷔통 등 명품업체들이 ‘테이블 북’을 내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어 뉴욕에 출판했단다. 그리고 각종 패션 명가들의 책과 나란히 맨해튼 플라자 호텔의 북 부티크에 진열해놓고, 이곳에 들락거리는 입 싸고 소문 잘 퍼뜨리는 뉴욕의 패션피플들을 공략한 거다. 국내에 한 권 있다는 책을 수소문해서 빌려 봤다. 도입부에 그랜드 바자의 그림들과 함께 엄마에게서 들었다는 옛날이야기, 할아버지가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놀았던 드넓은 시장의 추억으로 10여 쪽에 걸친 ‘스토리텔링’이 이어졌다. 그 뒤는 모두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과 상점과 상인들의 모습을 담은 화보다. 이 책 한 권이 뉴욕 패션피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10년 넘게 경제 현장기자를 하다 보니 세계 각국의 시장을 꽤나 섭렵했다. 그런데 내게 가장 역동적이고 어메이징(amazing)한 시장을 꼽으라면,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이 으뜸이다. 아동복·액세서리·그릇·잡화 등이 집결한 남대문 시장엔 좁은 점포마다 각자 제작하거나 조달한 각기 다른 물건들이 넘친다. 순대고무줄이나 깃털볼펜 등 남대문표로 출발해 세상에 흔해진 상품들도 숱하고, 요즘도 늘 새로운 아이디어 잡화들이 나온다. 발품을 파는 만큼 새로운 물건들을 접하게 되는 이 드넓은 시장엔 지방 소매상인들뿐 아니라 멀리 남미에서까지 전 세계 상인들이 물건을 떼러 온다.

 거대한 의류 도매시장인 동대문의 역동성도 말할 것 없다. 최근 패션계의 리더로 떠오른 패스트패션계가 매달 서너 번의 신상품을 출시한다지만 동대문의 신상품 회전주기는 하루다. 카피캣 논란도 있지만 유학파 디자이너들까지 합세해 새로운 패션을 제안하는 곳도 이곳이다. 물론 동대문 시장은 관광명소다. 요즘도 외국에서 온 관광객과 소매상들이 많이 찾는다. 또 외국에서 온 손님을 동대문 야간시장에 데려가면, 그 넘치는 상품과 활력과 도소매를 함께하는 능동적 상술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두 시장은 알고 보면 이렇게 외국인에게도 꽤 알려져 있고, 매력과 경쟁력도 있다.

 물론 아직 그랜드 바자에 못 가본 터라 우리 시장이 더 낫다고 우기진 못하겠다. 하지만 우리 시장이 역동성과 부지런함, 상품의 다양성에서 세계 여느 유명 시장과 견주어도 손색없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랜드 바자는 터키도 모르는 뉴욕의 패션피플에게서 ‘꿈같은 재래시장의 명품’으로 대접받고, 우리 남대문·동대문 시장은 그냥 변방의 시장일 뿐이다. 뉴욕 패션피플에게 인정받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이들이 떠들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온갖 패션잡지와 매체들이 따라서 움직인다. 매체들은 스토리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이것이 대중에게 퍼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명소가 된다. 세상의 명성이란 이런 과정을 통해 쌓이는 거다. 재래시장을 명품처럼 포장해 홍보한 발상의 전환, 그 한 끗이 이렇게 ‘명성’을 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