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줄 몰라" 한국 중장년, 퇴직후 하는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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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은퇴하면 경제 형편과 건강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가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즐길 게 있어야 하고 같이 즐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광주광역시 박모(58)씨는 지난달 32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 퇴직했다. 퇴직 후 한 달여간 집 주변을 산책하는 게 그의 유일한 여가생활이다. 취미 생활은 없다. 회사 다닐 때 평생 밤 9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어 즐길 시간이 없었고 즐길 방법도 몰랐다.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책을 가끔 보는 정도였다. 그는 “퇴직 전에 남는 시간에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하던 게 취미였을까”라고 했다. 사회적 관계도 그렇다. 회사 동료나 친구 몇몇 말고는 딱히 다른 모임을 갖고 있지 않다. 은퇴하고 나니 만날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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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씨의 노후를 위한 여가생활 준비 점수는 21점. 수·우·미·양·가로 따지면 ‘가’에 해당한다. 박씨는 “평생 일만 하다 보니 은퇴 후 여가생활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박씨의 모습은 한국의 중년 남녀를 상징한다. 보건복지부·국민연금공단이 노후준비지표를 개발해 전국 성인 남녀 1035명(35~64세)에게 적용해보니 여가활동 준비 점수가 48.1점(만점은 100점)에 불과했다. 소득과 자산이 40.5점으로 가장 낮았고 사회적 관계 63.9점, 건강한 생활습관 68.2점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네 가지 분야 42개 지표를 따졌는데 평균 55.2점으로 전반적으로 노후 준비가 부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소득이나 건강 분야 준비 실태가 부실하다는 조사는 많았지만 여가나 사회적 관계를 따진 것은 처음이다.

 여가생활 분야는 준비 현황과 의지 등 일곱 가지 세부 항목을 조사해 점수화했다. 응답자의 39.7%는 노후 취미나 여가생활을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 거의 없었다. 53.1%는 노후를 고려해 취미·여가생활을 시작한 적이 전혀 없었고, 46.8%는 지금도 별다른 취미·여가 생활이 없다고 답했다. 일곱 가지 세부 항목을 종합하면 응답자의 64.1%가 노후 여가생활 인식과 준비에 관심이 적고 현재 여가생활에도 소극적인 유형에 속했다. 노후 여가 준비를 잘하고 지금도 적극적인 사람은 21.2%에 지나지 않았다.

 준비 없이 퇴직하다 보니 하루 중 TV 보는 시간이 길다. 삼성생명은퇴연구소가 최근 50~70대 은퇴자 3826명을 조사한 결과 60대 남성의 하루 평균 TV 시청 시간은 약 4시간17분으로 취미활동 시간의 5배, 운동·레저의 2.4배에 달했다.

 충북에 사는 윤모(61·초등학교 교사)씨는 내년에 퇴직을 앞두고 있다. 건강이 나빠져 여가활동을 거의 못하고 있고 은퇴 후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는 “주변의 퇴직 교사들을 보면 등산밖에 하는 게 없어 심심해하더라”며 “직장생활에서 익힌 전문지식을 봉사활동으로 연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이재용 고령사회정책과장은 “직장에 다닐 때 일만 하다 보니 노후 여가활동 준비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 상태에서 은퇴하면 어떻게 여가를 보낼지를 모른다. 봉사활동도 안 해본 것이라서 쉽게 발을 들여놓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이 과장은 “시간을 쪼개 노후에도 즐길 수 있는 취미나 여가활동을 미리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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