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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파트도 ‘관리비 연체’ 딱지… 빚더미에 땡처리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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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강나현 기자]

서울 강남 한복판의 번듯한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 게시판에 ‘관리비 연체 경고’ 안내문이 붙었다.

그 옆 우편함에는 ‘요금 미납 누적에 따른 도시가스 공급 중단’ 통지서도 놓였다. 대한민국 대표 부자 동네로 부러움을 사 온 곳의 고급 아파트단지에서 요즘 버젓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강남·서초·송파 이른바 ‘강남 3구’도 주택경기 침체 장기화에 따른 홍역을 치르고 있다. 분양가에서 반토막 가까이 떨어진 ‘반값 아파트’나 은행 대출이자 부담에 경매로 넘어가는 ‘땡처리 집’이 수두룩하다. 집값이 은행 대출과 전세보증금을 합한 것보다 낮은 ‘깡통 주택’도 급증하고 있다.

집값이 떨어지는 가운데 매매도 끊겼다. 집을 팔려는 이는 넘치는데 실수요자가 거의 없다. 경매시장에서는 거듭된 유찰로 값이 반토막 난 물건이 쌓이고 있다.

집값 떨어져도 ‘사자’ 실종

부동산 크러시(crush·붕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집이 한 채뿐인데도 크게 떨어질까 봐 현금화하고 변두리 전세를 구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다.

가계부채 1000조원 시대를 앞두고 은행 빚 보태 집 한 채 간신히 마련한 죄로 원리금 상환에 생활고를 겪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주변에 널렸다.

강남 8학군에 속하는 서울 역삼동의 한 고급 아파트단지. 47평형까지 500가구 가까운 규모의 이 신축 단지 관리사무소 게시판엔 관리비 체납 경고문이 붙었다.

‘관리비 체납 가구가 너무 늘어 모종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아파트에 사는 한 대기업 간부는 “서울 강남에 오래 살았지만 그런 경고문은 처음 봤다. 집값 떨어진다는 주민 반발이 잇따르자 며칠 뒤 부랴부랴 뗐다”고 전했다.

관리사무소 측은 “주민들이 항의할 그런 경고문을 왜 붙이냐”고 시치미를 뗐지만 “관리비 연체가 늘어나는 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이 단지의 분양면적 154.86㎡(47평형) 아파트 한 채는 최근 거듭된 경매 유찰로 최저 입찰가가 감정가의 절반 가까이로 떨어졌다.

감정가 17억원으로 1차 경매를 해 유찰된 뒤 2차도 매수자가 없어 최저가 10억8800만원의 3차 경매에서 가까스로 낙찰됐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34층 중 32층에다 남향이라 그 가격엔 아까운 물건이다. 은행 대출금 상환 압력을 견디지 못해 경매에 부쳐졌단 얘기를 들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우리를 포함해 많은 부동산중개업소가 원매자가 없어 매물 신청을 잘 받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단지는 2년 전 분양 때만 해도 수십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아파트 분양광고를 찾아봤다.

땡처리 아파트 늘었지만…

‘전철 분당선 한티역이 가까운 역세권에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초중고교가 많다. 대치동 학원가도 가깝다’는 내용이었다.

부동산중개업소의 한 직원은 “분양 당시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큰 평수로 옮긴 사람들이 더 어려움을 겪는다”며 “40평대 이상은 급매물조차 찾는 이가 없어 경매로 넘어가기 일쑤”라고 말했다.

아직도 우리나라 집값은 거품이 더 빠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문제는 수십 년간의 집값 상승 기조로 주택에 편중된 한국인의 자산구조다.

가계자산의 70%에 달하는 주택이 단기간에 충격을 받으면서 주택담보대출 부담은 가계 부실은 물론 금융 부실로 이어질 뇌관이 될지 모른다.

9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의 절반 수준이 주택 관련 대출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올 한 해만도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이 120만 가구, 총 80조원에 달한다. 가구당 8300만원꼴이다.

이런 가운데 집을 팔아도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과 세입자에게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기 힘든 깡통 주택이 속출하고 있다. 금융회사 등 채권자가 담보로 잡은 아파트를 경매로 팔아도 대출금을 다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난달만 은행권의 미회수 채권액은 623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1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늘었다. 올 상반기 전체 미회수 채권액도 2126억원으로 전년 동기(1736억8000만원)보다 많다.

아파트 땡처리도 늘고 있다. 부동산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 상반기 수도권 아파트 경매는 1만321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 늘었다.

이 회사의 하유정 연구원은 “강남 3구의 경우 올 상반기 경매에 나온 물건이 역대 최고치인 807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집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사자’는 거의 실종됐다. 부동산정보업체 닥터아파트에 따르면 7월 둘째 주(7월 6~12일)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 주간 변동률은 -0.04%, 지방 5대 광역시는 -0.01%였다.

서울에선 양천구(-0.33%)가 가장 많이 떨어졌고 송파구(-0.12%)·강남구(-0.10%) 순이었다. 이런 추세 때문인지 주택시장에선 12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전격 인하의 약효가 작을 것으로 내다봤다.

은퇴 맞는 50대 직격탄 맞아

‘하우스 푸어’는 집 한 채 번듯하지만 속 빈 강정인 경우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소득의 30% 이상이 원리금 상환에 들어가며 자산 대비 부채비율이 100%를 넘는 사람을 하우스 푸어로 정의했다.

이 연구소가 수도권과 5대 광역시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2000가구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16.2%가 하우스 푸어였다.

전체적으로 거래가 실종되고 집값은 자꾸 떨어지면서 담보대출 연체율도 증가하고 있다 우리은행 안명숙 PB(프라이빗 뱅커)는 “2년 전만 해도 경기가 살아나겠지 하는 분위기가 강해 어떻게든 버티던 사람들조차 연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퇴직으로 정기적인 수입원이 없거나 은퇴를 앞둔 50대 중산층이 더욱 심각하다. 노후에 주택 규모를 줄여가면서 집 팔고 남은 돈으로 생활비 등을 충당하려고 했지만 이런 인생 설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기업 간부 한인수(52·가명)씨는 2007년 말 은행 돈 5억원을 빌려 서울 강남 지역에 34평형 아파트를 10억원에 샀다. 한 달 이자만 월급의 절반가량인 300만원에 달했지만 집값이 1년 정도 쑥쑥 오를 때는 마음이 푸근했다.

그러다 2009년부터 집값이 떨어져 요즘은 구입가보다 2억원 낮아졌다.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에 몰려 집은 올해 초 경매로 처분하고 해외 이주한 선배 집에서 임시로 살고 있다. 그는 “아직도 빚에 허덕여 명예퇴직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서브프라임 위기 막아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집값 급락에서 비롯됐다. 집값보다 빚이 많아지는 ‘네거티브 에퀴티(negative equity)’ 상황이 확산된 때문이다.

신용이 낮은 이른바 ‘비우량 고객’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파생금융상품이 해당 금융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쳐 금융시장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우리 정부는 한국판 서브프라임 위기설을 일축한다. ‘주택담보대출(Loan To Value·LTV)’ 비율이 근거다. LTV는 은행이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줄 때 적용하는 집값 대비 대출 한도다. LTV는 집값의 절반(40~60%) 수준이다. 집값이 10억원이면 은행 대출은 4억∼6억원까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은행은 집값이 반토막 나도 정상적인 경우라면 원금을 건질 수 있다.

하지만 집값 하락 속도가 빠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근래 LTV가 80~90% 수준까지 치닫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주인이 집을 전세로 내준 경우는 은행 대출금에 전세보증금까지 더해져 집을 팔아도 은행과 세입자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수 없는 깡통 주택이 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LTV가 점점 높아지자 은행 등 채권자들이 그나마 버틸 만한 아파트들조차 원금 상환을 압박하며 경매로 넘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에 집 급매물이 늘고, 가격이 급락하는 악순환이 가속화하면 부동산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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