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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 차이나] “마오쩌둥이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3차 ASP]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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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과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그 즐거움이 끝이 없고, 땅과 전력을 다해 싸우면 그 즐거움이 끝이 없고, 사람과 분투하면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與天奮鬪, 其樂無窮, 與地奮鬪, 其樂無窮, 與人奮鬪, 其樂無窮)”
마오쩌둥(毛澤東)의 『’윤리학원리’ 독서노트』 중

#2. “모든 혁명 당파, 혁명 동지는 장차 그들(농민) 앞에서 그들의 검증을 받고, 취사선택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앞에 서서 그들을 영도할 것인가? 그들의 뒤에 서서 손짓 발짓하며 그들을 비판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맞서서 그들을 반대할 것인지? 모든 중국인은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단 시국은 당신에게 신속한 선택을 강요한다.” 마오쩌둥의 『호남농민운동고찰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1927.3) 중 ‘농민문제의 엄중성’에서

#3.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전중국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할 때였다. 1962년 2월과 5월 류샤오치(劉少奇)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와 중앙공작회의를 소집했다. 경제 정책의 전환이 논의됐다. 우한(武漢)에 내려간 마오쩌둥의 결정이 필요했다. 류샤오치는 톈자잉(田家英)에게 시켜 마오쩌둥의 귀경을 요청했다. 6월 하순 마오쩌둥이 돌아왔다. 7월 상순 어느날 류샤오치가 중난하이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던 마오를 급히 찾았다. 류샤오치는 물 밖에서 마오를 기다렸다. 둘의 대화는 점차 언성이 높아졌다.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류샤오치에게 쌓여있던 불만을 쏟아냈다. 류샤오치 역시 하고 싶던 말을 다 내뱉었다. 류가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소. 역사는 당신과 내 위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기록할 것이요(歷史要寫上爾我的 人相食 要上書的)!” 마오 역시 지지 않았다. “삼면 홍기(사회주의건설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까지 부정하는군. 땅이 갈라졌소? 당신은 왜 견디지 못하오? 내가 죽은 뒤에는 어쩌겠소!”
『당신이 알지 못하는 류샤오치(?所不知道的?少奇)』(왕광메이 등 저, 허난인민출판사, 2000)

두 얼굴의 혁명가 마오쩌둥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세 장면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하늘·땅·인간을 상대로 ‘맞짱’을 뜨겠다며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농민 앞에서 영도하던지, 농민 뒤꽁무니를 따르며 비난하던지, 농민과 대결하던지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전 중국인을 상대로 협박했다. 그 자신은 농민의 열 발자국 앞에서 “나를 따르라”며 농민을 이끌었던 혁명가였다. 마오쩌둥의 판단 착오로 3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2인자 류샤오치가 “역사가 당신과 나의 시대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로 기록할 것”이라며 마오의 역린을 건드렸다. 마오는 10년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을 발동해 보복했다. 바로 마오쩌둥의 본모습이다.

지난 7월2일 저녁 7시100여 명의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들과 지인들이 서울대학교 인문대 신양관 3층 국제강의실에 모였다. 동양사학과 동문회가 매달 첫째주 월요일 저녁에 진행하는 ASP(아시안 스터디 프로그램, 일명 After Service Program)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강사는 78학번 김형종 동양사학과 교수였다. 중국 현대사 전문가인 김형종 교수는 ‘마오쩌둥과 현대중국: 두 얼굴의 지도자’란 주제로 열띤 강의를 펼쳤다. 김 교수는 강연 말미에 “마오쩌둥이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이란 질문을 던지며 “아마도 중국의 현재 농민들은 마오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
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앞의 세 장면은 강의 중 김 교수가 강조한 내용이다.

한국은 지금까지도 마오쩌둥의 불모지다. 아직 마오 전문가라고 할만한 학자는 한국에 없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생전에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저서에서 그의 저작을 인용한 바 있었다. 당국은 학자의 의도는 무시한채 마오쩌둥을 지나치게 많이 인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책을 금서 리스트에 올렸다. 그 결과 한국은 마오쩌둥 선집이 세계에서 가장 늦게 번역 출판된 나라가 됐다. 번역 품질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결국 한국에서는 마오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만이 오랫동안 유포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 혐오 혹은 일방적 찬양. 한국에서 마오쩌둥은 지금까지도 피상적인 제3자일 뿐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애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은 공산당이 왜 승리했는가는 잘 보여주지만 1949년 이후의 마오를 보여주지 못한다. 말년의 마오를 알아야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 『모택동의 사생활』, 『새로운 황제들』도 같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마오쩌둥은 위대한 시인이자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였다. 마오쩌둥의 저작을 보다가 덩샤오핑 선집을 들추면 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먼저 부자가 되라.” “쥐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 ‘잘 먹고 잘살자’류의 덩의 발언들은 마오의 고매한 문학적 문장에 비하면 저속하기 그지 없다. 달라도 크게 다르다.

만일 마오가 50년대에 사망했다면 그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카리스마를 가진 신(神)이 되었을 것이라고 김형종 교수는 평가했다.
한편, 마오쩌둥은 한국의 은인이다. 만일 마오가 말년의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떻게 됐을까? 한국에 박정희가 수 십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한국의 경제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이 50년대 60년대부터 덩샤오핑 식의 개혁개방을 했다면 한국은 지금도 북한의 경제 수준에 머물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오쩌둥은 한국의 은인이다. 미국이 포기한 장제스를 기사회생 시킨 김일성이 대만의 은인인 것과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은 마지막 황제였다. 황제형 권력을 맘껏 행사한 사람이다. 1945년 중국공산당은 당규에 최종 권력은 마오가 지닌다고 명기했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지도자라 하더라도 그에게 모든 권력을 죽을 때까지 부여하는 것의 위험함을 중국인들은 깨닫지 못했다. 종신제는 최악의 정치 제도다.

1949년 마오는 황제가 되었다. 그 많던 중국인 중에 이를 깨달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극의 시작어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마오쩌둥의 『호남농민운동고찰보고』는 27년 마오가 지은 원본 그대로가 아니다. 삭제되고 편집된 판본이다. 마오는 애당초 마르크스 레닌식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40년 또는 수 천년 동안 이루어본 적이 없는 기적이다. 만일 민주혁명을 완성하는 공적을 10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시민과 군대의 공적은 단지 3을 차지할 뿐이며, 농민이 향촌에서 이룬 혁명적 공적은 7을 차지한다”고 마오는 원본에 적었다. 농민과 도시의 시민과 군대는 있지만 노동자는 없다. 마오는 노동자를 부정한 공산주의자였다. 마오는 소련식 지도를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다.

마오와 대적했던 장제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1931년 국가 전체 재정에서 53%, 37년에는 66%까지 나라돈의 절반 가까이를 군사에 쏟아부었다. 송나라 주희의 정책이었던 안내양외론을 신봉했다. ‘타도 공산당’이란 신념으로 일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결국 실패했다.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1만여명 홍군을 뿌리 뽑지 못해 패배했다. 그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 같은 코스로 패퇴했던 태평천국의 석달개를 때려잡은 청나라는 곧바로 망하지는 않았었다.

“인민은 일어섰는데 마오 주석은 더 크게 일어섰다”는게 김형종 교수의 평가다. 현대 중국사의 한 장을 이루는 비극의 이유다. 마오는 1949년 대륙 공산화 이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쓴 『중국 백서』를 '유심역사관의 파산'이란 글로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인구가 아니다. 계급 투쟁, 수탈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마오는 ‘인구가 힘’이라고 주장했다. 저명한 인구학자 마인추(馬寅初, 1882~1982)의 신인구론을 비판했다. 문해(文海)전술로 마인추를 핍박했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대신 발언권을 박탈당했다. 중국이 마인추의 말을 무시하는 사이 중국의 인구는 3억5000만명이 늘었다. 대약진, 문화대혁명보다 ‘마오의 인구론’이 중국에 더 큰 비극이었다고 김형종 교수는 평가했다.

마오는 중국의 유일한 마오쩌둥 주의자였다. 그는 당노선을 이탈했다. 50년대 중반부터다. 당대회에서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별볼일 없는 학교 졸업식과 같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곳에서 전략적으로 강령성 지시를 내렸다. 어린 학생을 동원해 동료 당원을 공격했다. 그것도 안되자 군대를 동원해 당을 ‘포격’했다. 앞에서 본 류샤오치 같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당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제대로 된 사상을 가진 냉정한 지성은 중국 공산당 안에 없었다. 맹종하는 무리들만 있었다.

대약진 운동 당시 대기황이 중국을 덮쳤다. 쓰촨 한 개 성에서만 940만 명이 굶어죽었다. 1958년부터 1962년 사이에 총 3245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는 공식 기록이 전한다. 끔찍한 사실은 또 있다. 허난성 신양현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혁명 원로 리센녠이 직접 조사했다. 1960년 한 개 현에서 100만 명이 아사했다. 그 가운데 6~7%는 맞아 죽었고, 5%는 자살로 죽었다. 당시 전 중국에서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람을 4500만 명으로 보는 통계도 있다. 원인는 인민공사화였다. 명분은 완벽한 공산주의의 실현이었다. 집집마다 있는 부엌을 모두 없애 버렸다. 단체 급식 식당에 먹거리가 떨어지면 밥을 할 장소조차 없었다. 생산량 과장 보고는 경쟁적으로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농업 생산량의 절반은 국가가 세금으로 징수했다. 수백% 과대 보고된 생산량에 맞춰 낼 세금이 없었다. 실상을 알게된 펑더화이가 여산회의에서 마오를 비판했다. 마오는 내가 다시 유격대를 조직해 맞서겠다고 반박했다. 옆의 동료들은 펑더화이를 두둔할 수 없었다. 결과는 펑더화이의 실각과 4000여 만명의 아사였다.
다시 한 번 돌이켜보자. 마오는 농민을 위해 혁명을 했다. 그렇다면 중국 농민의 지위는 청나라, 국민당 시절보다 나아졌을까? 마오가 꿈꿨던 중국과 지금의 중국은 같은 모습일까?

지금 중국의 농민들은 다시는 농민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베이징, 상하이의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농민은 당(唐)나라 때부터 일을해 돈을 모아야 한다는 자조섞인 말이 유행한다. 마오는 농민을 위해 사회를 바꿨다. 오늘날 농민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오에게 대약진 운동은 선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잘못으로 치기에는 결과가 엄중했다.

이날 강의가 끝난 뒤 열띤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이인용 동문은 “마오쩌둥에 대해서 ‘공이 7이요 과가 3’이 중국의 공식평가”라며 “이 시점에서 마오를 다시 평가한다면 같은 결론이 나올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김형종 교수는 “공식적인 평가의 기준과 마음속의 평가는 다를 것”이라고 답했다. 덩샤오핑의 결론은 대외적인 공식적 평가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덩샤오핑 역시 마음 속으로는 7:3이 아닌 최소한 거꾸로인 3:7 아니었을까? 하지만 덩샤오핑은 공산당이 마오쩌둥을 부정한다면 자신을 포함해 공산당 전체를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정적 평가를 원천적으로 할 수 없었다. 대약진 당시 1000만 여명이 굶어 죽었던 쓰촨성의 공산당 책임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누구도 당시 당간부를 비판하지 않았다. 북한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굶어 죽으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이유다. 집단이 모든 것을 앗아갈 때 나오는 결과다. 홍콩 쪽 자료에 따르면 저우언라이 역시 말년에 마오쩌둥 지지를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 사람에게 지나친 권력을 주는 시스템의 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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