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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악몽에 … 급히 고개 숙인 미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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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미 7공군사령관 잔 마크 주아스 중장이 8일 경기도 평택시 신장동 K-55 오산 공군기지에서 기자 회견을 시작하기에 앞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있다. 주아스 중장은 미군 헌병대가 지난 5일 영외순찰 중 시민 3명에게 수갑을 채워 물의를 일으킨 사건에 대해 “피해를 입은 평택시민께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주한미군 헌병대가 경기도 평택 미군기지(K-55) 주변에서 주정차 문제로 한국인과 시비를 벌이다 민간인 3명에게 수갑을 채운 사건이 5일 발생했다.

 사건 3일 만인 8일 제임스 서먼 주한미군사령관이 직접 나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문을 냈다. 7일엔 잔 마크 주아스 주한미군 부사령관(미7 공군사령관·중장)이 외교통상부의 ‘초치’(부름)에 응해 외교통상부에 와 민간인에게 수갑을 채운 데 공식 항의한 이백순 외교통상부 북미국장(SOFA 합동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에게 유감의 뜻을 밝혔다. 주아스 부사령관은 경찰 조사에도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주한미군 최고위급 인사들이 신속하게 사건 수습에 나선 것이나 외교통상부가 주한미군 부사령관에게 항의표시를 한 것 등은 이례적이다.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이·미선이 사건’ 때와는 다른 양상이다. 당시엔 미군 측이 고의 없이 공무 중에 발생한 사고라며 초동 단계에서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재판 관할권까지 행사해 결국 가해자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의 반미 감정을 자극해 그해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줬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주한미군의 ‘영외순찰’에서 비롯됐다. 5일 오후 평택시 신장동 미군기지 K-55 인근 로데오거리에서 미 헌병대 소속 헌병 3명이 부대 바깥을 순찰하던 도중 양모(35)씨가 운영하는 악기상점 앞에 주차된 다마스 차량을 발견하고 이동을 요구했다. 헌병들은 부대 정문 주변 500여m에 걸쳐 형성된 로데오거리가 평택시 조례에 따라 주정차 금지구역인 데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영외 순찰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양씨와 실랑이를 벌이던 헌병들은 결국 양씨가 이들의 요구에 응했음에도 수갑을 채웠고, 이에 항의하는 행인 신모(52)씨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양씨와 신씨 등은 150여m 떨어진 부대 정문까지 연행됐고, 오후 8시35분쯤 출동한 송탄파출소 소속 경찰 4명이 “수갑을 풀어주라”고 요구했으나 헌병들은 묵살했다. 오히려 양씨의 동생(32)에게까지 수갑을 채웠다. 경찰이 재차 항의한 뒤에야 헌병들은 결국 수갑을 풀어줬다.

 주아스 부사령관이 한국 경찰에 이에 대한 수사 협조를 약속한 이후 수갑을 채운 헌병 3명은 평택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이들은 “한국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양씨가 밀치고 도주하려 했다”고 책임을 양씨에게 떠넘겼다고 경찰은 전했다.

 SOFA 협정에 따르면 미군은 영외 순찰이 가능하긴 하지만, 반드시 한국 당국과의 별도 합의에 따르도록 돼 있다. 또 ‘필요할 경우 주한미군과 한국 경찰의 합동순찰을 최대한 활용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경찰 인력 부족을 이유로 의경 2명과 미군이 매주 금·토요일 2회만 오후 9시부터 오전 4시까지 합동순찰을 해왔다. 이에 주아스 주한미군 부사령관은 8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순찰 규정을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고, 패트릭 매켄지 미 51전투비행단장도 7일 김선기 평택시장을 만나 “영외 순찰 시 한국 경찰과 적극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외교부와 주한미군 양측이 신속히 사건 진화에 나선 것은 ‘효순이·미선이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올해는 효선양과 미선양이 숨진 사건이 발생한 지 10주년 되는 해다. 미군과 민간인의 충돌 사건이 자칫 반미 감정이나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봉합에 나선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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