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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웃으며 곡할 줄 알아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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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지난 주말 성남 남한산성을 찾았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속 척화(斥和)파 김상헌과 주화(主和)파 최명길의 논쟁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왕(인조) 앞에서 벌이는 그들의 대화는 이랬다. “(김상헌)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도 기꺼이 싸우는 것이 전(戰)이요, 화해는 화(和)가 아니라 항(降)일 뿐입니다.” “(최명길)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편이 이익일 터, 의(義)를 내세운다고 이(利)를 버릴 수는 없소이다.” 그들은 성(城)에 갇혀서도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37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혹 그 ‘성’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청와대와 외교부의 합작품이라는 ‘한·일 군사정보협정’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핵심은 결국 우리 이(利)를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에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중국 포위전략’에 참여할지의 여부다.

 세계 제2위 경제대국 중국은 ‘(미국의) 포위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앞세워 둘러싸려 한다고 의심한다.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가 사설에서 이번 협정을 ‘중국을 겨눈 한·미·일 3각 동맹’으로 규정한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위험 분산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노력이 반(反)중국 연합으로 비친다면 더 큰 위험을 키울 수 있다. 한반도가 또다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지점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위험 분산 차원에서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하더라도 치열하게 중국을 설득해야 한다. 한·미·일 협력은 한반도 안정을 위한 것일 뿐임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명박(MB) 정부는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는 평가다.

 많은 정치전문가가 미국·중국과 모두 손을 잡아야 한다는 ‘연미연중(聯美聯中)’을 제기한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게 어렵다면 ‘미국과 연합하되 중국과 통하는(聯美通中)’ 수준까지는 가야 한다. ‘친중이냐, 친미냐’는 이분법적 구조로는 한반도 정세 안정과 통일이라는 이(利)를 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국 핵심부와 소통하고, 조율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현실은 암울하다. 베이징의 한 상사원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중국 정치인을 만나면 말발이 서지 않는다”고 말한다. 금방 밑천이 드러나니 토론이 될 리 없단다. 돌아갈 때 ‘서울 가면 중국 공부 많이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거기가 끝이다. 그들의 결심은 정쟁(政爭)의 파랑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다시 소설 남한산성. 김상헌이 “명길의 말은 의도 아니고 이도 아니옵니다.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哭)하려는 자이옵니다”라고 비난한다. 국가 대사에 어찌 의(義)만 있을 것인가, 답답한 최명길은 물러나며 이렇게 읊조린다. “웃으면서 곡할 줄 알아야….” 소설 속 최명길은 국익과 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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