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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물에 빠지는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8호 18면

일러스트=강일구

공포는 분명 유쾌하거나 행복한 감정이 아닌데 사람들은 왜 공포물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런 취향을 어린 시절의 억압된 공포를 재체험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기계적으로 괴물을 처치하는 단순한 역할게임(Role playing game)을 할 때, 또 번지점프를 할 때의 짜릿한 모습, 맹수 앞에서의 본능적 공포보다는 좀 더 복잡한 플롯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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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공포물은 대부분 철없는 젊은이들의 섹스, 마약이나 술 파티, 혹은 앞으로 닥칠 위험은 모르고 생각 없이 지내는 순진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부모나 교사 혹은 조직에 대한 불만, 혹은 강자와 약자 간의 갈등이 조금 섞일 때도 있다. 다만 앞으로 닥칠 끔찍한 상황을 알지 못하니, 지능이나 돈 버는 능력과는 상관없이 순수한 상태로 묘사된다. 공포를 유발하는 캐릭터들도 몇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뱀파이어나 구미호처럼 성적 매력으로 가득하지만 상대의 원기를 빨아먹는 유형, 좀비나 흉측한 외모를 갖고 피해자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훼손하는 유형이 있다. 외계인이나 안개 속의 괴물처럼 공포를 유발하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또는 마치 고전영화 ‘로즈마리의 아이’에서처럼 이웃집의 친근한 부부나, 교사나 코치가 공포 유발자이기도 하다.

극심한 공포상황을 견디면서 이들의 정체가 밝혀지고 완전히 제거되면, 그동안 철없고 약한, 혹은 이유 없이 반항적인 주인공들이 대개는 성숙하고 강한 인물로 변신한다.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공포물도 무서운 용을 물리치는 기사들의 성장담과 비슷한 일종의 영웅신화임을 알게 된다. 오래된 민담이나 신화에 비슷한 얘기들은 많다. 손 없는 처녀, 럼펠스틸츠킨(Rumpelstiltskin), 지네장터, 천년 묵은 여우, 청도깨비 이야기들은 끔찍한 호러 영화 그 자체다. 중국의 오래된 책, 산해경에 등장하는 기굉국의 괴물들이나 오비드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메두사, 메디아, 미노타우어 같은 주인공들 역시 현대물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된다. 융이 지적한 대로 현대인의 공포심은 원시인들의 근원적인(primordial) 공포와 원형적으로 맞닿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대개는 공포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삶 그 자체에서 공포물보다 더한 좌절, 끔찍한 사고와 죽음들을 경험한 탓에 피와 죽음을 보는 것 자체가 싫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영웅으로 재탄생할 기력도, 필요나 가능성도 없다는 피로감 때문인 면도 있다. 세계적인 불황,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에 따른 소외감, 원전 사고나 기름 유출로 인한 환경오염 같은 진짜 무서운 상황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터라 또 다른 공포심에 노출될 만한 기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공포물을 다시 볼까 싶다. 아직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 보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만 귀신이 안 무서워?” 라고 물어 보면 “귀신은 안 무서운데, 사람은 무섭구나”라고 답하곤 했었다. 불안이 투사된 상상 속 괴물 이상으로 나를 더 끈질기게 괴롭히는 현실의 어떤 것들과 대적해도 기죽지 않을 담력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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