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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구름소리·돌소리·나무소리 들으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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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호 27면

이런 곳으로 갈 생각이라면 인간이 만든 음악은 잠시 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음악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라도. [중앙포토]

몇 시간 후면 몽골행 비행기를 탄다. 해외여행이야 특별할 것 없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가슴이 설렌다. 대부분 익숙한 나라들을 편안한 그룹투어로 다녔던 터라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몽골은 내게 막연한 미지의 땅이다. 더욱이 행선지가 수도 울란바토르가 아닌 난가르, 솔롱고 등의 이름이 붙어 있는 오지의 게르 캠프다. 여행을 이끈 사진작가 친구 윤광준의 경험담에 따르면 “깔끔한 여교수가 3일 만에 아무 데서나 등 돌리고 앉아 소변을 보더라”고 했던 태곳적 공간이란다. 그의 말을 더 옮겨 본다.

[詩人의 음악 읽기] 음악 없는 여행

“정말 이상하더라. 세상 어디나 이쪽이 있고 저쪽이라는 방위가 있잖아. 근데 거기는 한 번도 사람이 밟아본 흔적이 없는 거라. 그냥 전후좌우 한없이 뻥 뚫려 있는 광야인데 황당하더라고!”

홀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왔던 다른 친구의 증언도 떠오른다. “보름 동안 똑같은 삼나무만 계속 이어지는데 점점 미쳐 가는 것 같더라. 변화라고는 그저 삼나무숲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것뿐이야. 러시아 승객들은 내내 말 한마디 없는데 그게 더 무섭더군.”

우리는 샌드라 불럭의 영화 제목처럼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고장에서 산다. 다들 소음성 난청에 걸려 있는 듯 의사소통이 어렵고 집단광증에 걸린 듯 사건 하나하나에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과속성장의 대가치고는 참 가혹한 것이어서 하루에도 마흔 명 이상의 사람이 자살하는 세상을 산다. 엑소더스! 머지않아 만날 몽골은 내게 탈주의 환상을 안겨준다. 강박으로부터의 탈주, 시간의 치차로부터의 탈주, 좁아터진 울타리부터의 탈주. 카뮈의 유명한 말을 기억하자면 여행은 자기를 만나는 일이라고 했는데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나라는 환멸, 너라는 절망은 너무 익숙하고 지긋지긋하다. 바라건대 태곳적 공간에 압도돼 자아망실의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되기를!

음악 없는 여행이 될 것 같다. 휴대용 시디피 디스크맨에 음반을 바리바리 싣고 다녔었는데 더 이상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구름소리, 돌소리, 나무가 울고 웃는 소리를 들으러 가는 거니까. 혹시 몽골의 전통음악 후미(khoomi)를 들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네 판소리 진양조의 가슴 쥐어뜯는 흐느낌과는 또 달라서 후미의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은 도저히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음반으로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저런 소리를 음악으로 받아들였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어쨌든 기대를 잔뜩 품은 몽골 여행에서 내 일과를 늘 점령하고 있는 서방의 음악은 부재해야 한다.

살갑게 기억되는 여행지 음악을 떠올려 본다. 먼저 긴 시간 차를 달릴 때는 바로크 연주 음반이 제격이다. 어떤 작곡가, 누구의 연주라도 상관없이 다 똑같이 들린다. 반쯤 열어놓은 차창으로 바로크풍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트럼펫 사운드가 울리면 공연히 눈물이 난다. 장담하니 눈물이 나는지 안 나는지 한번 실험해 보시라. 행선지가 도심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일이라면 이어폰을 꽂고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예스, 더 나이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제네시스 등의 전성기 음반을 취한다. 눈앞의 다채로운 풍경과 뇌리를 헝클어뜨리는 프로그레시브 사운드가 뒤엉켜 경험 못한 마약적 환각상태로 마구마구 상승한다. 여행과 음악이 싸우는 형국이 벌어지는데 그런 날 밤은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다.

혹시 여행지에서 고적한 시간이 펼쳐진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음악이 필요하다면 슈만의 가곡, 리스트의 피아노 독주곡들이 좋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에 음악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를 텐데 나는 매우 긴밀한 공통점을 느낀다. 슈만의 리더크라이스, 미르테의 꽃 같은 가곡집과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 초절기교 연습곡 등의 피아노곡에는 같은 혈통의 피가 흐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련됨, 자아의 상승감, 약간의 난해함 뭐 그런 것.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낯선 여행지에서 슈만, 리스트의 현란한 음악을 듣노라니 자기 존재의 어려운 국면 혹은 진지한 내면세계가 입체적으로 부각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경험이 내게 있다.

가장 화끈한 여행은 자기가 발 딛고 사는 땅이 낯선 이방으로 느껴지는 상태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이보그로 변해 있고 저 혼자 아날로그 구닥다리로 뒤처져 있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자기 땅으로부터의 유배가 이런 때다. 단테의 실낙원 중 지옥편 지옥문 입구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든 희망을 포기할지어다!”

그래, 희망 따위는 포기하마. 하지만 사이보그들은 모른다. 아날로그 이방인의 은밀한 즐거움을. 저 혼자 동떨어져 있는 자의 짜릿한 독립감을. 나는 이제 몽골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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