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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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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호 26면

도쿄대지진 때 불타는 도쿄경시청. 일본은 도쿄대지진의 혼란을 한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해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사진가 권태균]

일본에서 고학 중이던 아나키스트 홍진유(洪鎭裕)는 1922년 도쿄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인노동조사회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일본 니가타현(新潟縣)에서 발생한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계기가 되어 창립된 단체였다. <새 사상이 들어오다③ ‘일본유학생과 북풍회’ 참조>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② 박열 부부 대역사건

홍진유는 “나는 그날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방청하러 가서 보니 조선인 공산주의자인 김약수가 그 모임의 사회를 보고 있었다. 내가 보니 노동조사회에 노동자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고, 김약수 일파가 매우 뻐기면서 노동자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해서 나는 야유를 퍼부었다”(홍진유 제2회 신문조서)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신영우(申榮雨)가 주소를 가르쳐 달라면서 “노동자의 일은 노동자 자신이 해야 한다. 저들은 야심으로 한다”고 말하고, 반 달쯤 후에 찾아와 박열(朴烈)을 알게 되고 흑우회(黑友會)를 만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재일 유학생들이 만든 흑도회(黑濤會)는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사이의 노선투쟁인 ‘아나-볼 논쟁’을 거치면서 아나키즘 계열은 흑우회가 되고 공산주의 계열은 북성회(北星會)로 갈라섰다.

박열·홍진유 같은 20대 초반의 고학생들이 흑우회를 결성하고 김약수·김종범 같은 20대 후반~30대의 유학생들이 북성회를 만들었다는 특징도 있다. 흑우회에는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 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도 함께했다. 박열은 흑우회 기관지 ‘후테이 센징(太い鮮人)’을 1923년 3월부터는 보다 온건한 제목의 ‘현사회(現社會)’로 바꾸어 발행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직접행동가’였다.

1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부인이자 아나키스트였다. 23세에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2 박열과 가네코. 옥중에서 찍은 이 사진은 일본에 큰 여파를 일으켰고 사진 촬영을 허가한 판사가 파면당하고 와카쓰키 내각도 무너졌다.

그는 일왕(日王) 및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곳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았다. 박열은 무산자동맹회의 초청으로 니가타현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1922년 9월 서울에 와서 김한(金翰)을 만났다. 박열은 김한이 의열단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폭탄 구입을 요청했다. 박열은 11월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 김한에게 “늦어도 1923년 가을까지는 폭탄을 인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1923년 11월로 예정되어 있는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박열 부부는 1923년 4월 정태성·홍진유·육홍균·이필현, 구리하라 가즈오,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등과 도요타마군(豊多摩郡) 요요하타초 요요기도미카야 1474번지 2층 셋집에서 따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박열이 ‘불령사’라는 나무 간판을 집 밖에 내건 것처럼 비밀조직은 아니었다. 정태성은 “불령사에서는 아나키즘 연구뿐만 아니라 직접행동도 논의되었지만 직접행동은 회원들의 자유의지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역시 직접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은 박열이었다.

박열은 1921년 12월 외항선원 모리다(森田)를 통해 외국에서 폭탄을 구입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고, 약국 수백 군데에서 폭약 판매 허용치인 0.02g씩을 사 모아 폭약을 제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박열은 서울의 기생 이소홍(李小紅)을 통해 여성용 손수건에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암호편지를 김한에게 보내 폭탄 구입을 재촉했다. 그러나 김한이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서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박열은 포기하지 않고 김중한(金重漢)에게 ‘조선에 돌아가 폭탄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중한은 ‘귀국하면 수행해 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박열은 훗날 일제 신문조서에서 “다른 방법에 의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생각을 굳히고 있어서 김중한에게 부탁했던 것을 거절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자 김중한과 애인 니야마 하쓰요는 불령사 모임 때 박열에게 크게 항의하고 8월 31일 도쿄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인 9월 1일 낮 12시 도쿄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0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10만9000여 동이 무너지고, 21만2000여 동의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인들이 공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그날 오후부터 돌연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일본 각의는 이날 밤 계엄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본 내무성은 ‘어딘지 모르게 흘러나온 조선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다.

‘도쿄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9월 3일자에 “불령선인(鮮人) 각소(各所)에 방화, 제도(帝都)에 계엄령 선포”라고 보도했다. 아이치현(愛知縣)의 ‘도요하시(豊橋)일일신문’ 9월 5일자는 “대화재(大火災)의 원인은 지진도 있지만 일면에는 불령선인 수천 명이 폭탄을 투하하고 시중에 방화한 데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대지진의 공포를 한인과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 등으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세력의 조직적 음모였다. 이 때문에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부부 등이 헌병 장교에게 살해되고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도 살해되었다.

가장 집중적인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재일 한인들이었다. 재향군인 등으로 구성된 자경단(自警團)은 무차별 한인 학살에 나섰다. 살해된 한인들의 숫자에 대해서 일본 사법성(司法省)은 23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도쿄대 교수를 역임한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2613명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실상을 축소·왜곡한 숫자였다. 상해 임정의 ‘독립신문’은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한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된 일본인이 59명에 달했으니 얼마나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9월 3일부터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인들을 검속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9월 3일 새벽 세다가야(世田谷)경찰서로 연행된 것을 비롯해 정태성·장상중·최규종·홍진유 등 불령사 회원들이 일제히 검속되는 등 모두 6200여 명의 한인이 검속되었다. 박열을 연행한 일본 경찰이 집주인에게 “영구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집을 빌려주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의도적 검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10월 16일에야 한인 대학살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를 해금시키는 한편, 10월 20일 느닷없이 불령사 회원 16명을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검사국에 기소했다. 일경은 불령사를 “무정부주의 경향의…사회운동 및 폭력에 의한 직접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단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령사는 간판까지 내건 공개 조직이란 점에서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였다.

박열 부부에게는 왕세자 결혼식 때 일왕 등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형벌이 사형 하나뿐인 대역죄(大逆罪)를 적용했다. 그 유일한 근거는 김중한의 애인 니야마 하쓰요가 그런 말을 전해 들었다는 진술뿐이었다. 일제 검찰은 1924년 2월 14일 박열 부부와 김중한에 대해 ‘천황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대역 예비죄’라고 예심을 종결지었지만 폭탄 구입에 관해 논의한 것을 대역죄로 모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예심 종결과 함께 1924년 6월 방면돼 이 가운데 홍진유와 서상경은 귀국해서 흑기연맹을 만들었다.

박열 부부 재판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국가 사회제도를 ‘제1계급-황족, 제2계급-대신 및 기타 실권자, 제3계급-민중’으로 나누고 “황족은 정치의 실권자인 제2계급이 무지한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날조한 가엾은 꼭두각시이자 나무인형이라고 생각한다”고 진술해 큰 충격을 주었다. 박열도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앞에서 박열이 “다른 방법에 의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생각했다”고 서술했는데, 해방 후 흑우회원 최영환(崔英煥)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상해에서 도쿄까지 실제로 폭탄을 운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쿄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아서 예정대로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면 폭탄을 투척했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26년 3월 판결공판 때 사형을 선고하자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라면서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태연했고, 가네코는 판결 순간 “만세!”라고 외쳐 재판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가네코는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되어 각각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도치기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로 이감된 가네코가 1926년 7월 23일 갑자기 사망했다. 형무소 측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와 원심창(元心昌) 등 흑우회원들의 사인 규명과 시신 인도 요구를 모두 거절해 ‘타살 의혹’이 짙어졌다. 옥중에서 “한 번은 저버린 세상이지만/글 읽으니/가슴에 솟는 가여운 슬픔”(나는 어디까지나 불행했나이다)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던 가네코는 23세에 불과했다. 박열은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에야 아키다(秋田) 형무소에서 22년 만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