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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어느 젊은 택시기사의 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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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그는 건장한 체구의 젊은 기사였다. 밤 10시, 야간 유흥의 열기로 달아오른 번화가, 작렬하는 네온 불빛에 슬쩍 비친 그의 얼굴엔 피로가 역력했다. ‘어디로 갈까요’라고 업무시작을 알리는 물음엔 약간의 좌절감도 배어 있었다. 택시는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버스전용차로를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가 말했다. 그러면 택시가 경쟁력이 있을 거라는 그럴듯한 설명도 덧붙였다. 맞다. 좋은 아이디어다.

 뭐가 문제였나? 급한 용무에 서둘러 거리로 나서면 지붕에 꼬마등불을 밝히고 코너를 돌아오던 그 흔하디흔한 택시들이 어느 하루 서울거리에서 사라진 것은. 택시요금으로 몇천 원 내고 이삼백원 거스름돈이 남아도 동전잎을 꼭꼭 챙겨가는 매정한 손님들을 하루에도 십수 명씩 대하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미터기를 꺾어온 그들이 왜 서울광장으로 몰려갔는지? 서울광장에 2000여 명이 운집해 맺힌 말을 쏟아내도 출장파출소에서 일어난 취객소동처럼 토막기사로밖에 취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에 배었던 좌절감이 슬쩍 분노로 바뀌었다. 톤이 높아졌다. 택시전용 연료인 LPG는 연비가 휘발유의 절반밖에 안 돼 사실상 연료비가 두 배 이상 든다는 것, 따라서 택시도 휘발유와 경유를 쓰게 해달라는 것, 택시요금이 10년째 묶여 있는데 약간이라도 인상해 달라는 것이 기사들의 숙원이었다. 물가 앙등을 부채질한다는 이유에서 서울시의 답은 ‘절대 불가’였다. 전국 17만 대 택시가 그날 하루 운행을 중단했다. 4만 대 택시가 사라진 서울거리는 휴일처럼 한산했는데, 어느 한가한 시민은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는 농담도 했다. 총파업으로 황금 같은 휴무를 맞았지만 택시기사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던 거다.

 “한번 예행연습을 해본 겁니다. 시월에 잔뜩 벼르고 있어요.” 시월이면 대선 정국. 5년 전 이명박 후보가 약속한 공약은 증발해버린 지 오래, 이번에야말로 전국 100만 명 기사 가족의 숙원을 풀어줄 후보에게 100만 표 몰표를 줄 예정이란다. 정치인들의 구미가 확 당기는 대목이다. 그 몰표가 택시기사들을 ‘장시간 저임금’ 노동의 늪에서 탈출하게 해줄지는 아직 모른다.

 “몸을 망쳤어요”. 젊은이답지 않게 그가 말했다. 하루 12시간에 매월 26일 근무하면 월 312시간, 1년이면 3744시간을 일한다. 한국인의 평균근로시간이 2193시간이므로 무려 1.7배 많고, OECD 회원국 평균 1749시간에 비해 2배 이상을 더 일한다. 아마 세계 최장노동시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5000달러 후진국 국민이 따로 없다.

 도대체 얼마를 버는데요? 그가 말했다. 낮교대는 10만원 사납금 내고 나면 1만5000원 정도, 밤교대는 12만원 사납금 내고 2만원이 남는다. 월급이 120만원이니까 점심·보험비 빼고 나면 한 달 수입은 120만~130만원 정도. 시급 4200원 노동이다. 대학생 편의점 알바보다 적다. 올해 법정 최저임금은 시급 4580원이므로 법이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전국 30만 택시기사들이 밤낮을 설친다. 낮교대·밤교대를 일주일씩 번갈아 반복하면 배겨날 사람이 없다. 쉬는 날 친구들과 술 한잔은 생각도 못한다. 자야 한다. 친구들에게서 잊혀졌다.

 우리들은 한국의 공공요금이 세계에서 가장 싸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 전기와 물값은 너무나 싸 그야말로 물처럼 쓴다. 의당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지하철 요금이 도쿄와 뉴욕의 3분의1, 택시비는 도쿄의 4분의1 수준이다. 도쿄에서 약 20분 택시를 타면 대략 2만원 정도가 나오는데, 한국에서는 5000원이면 뒤집어 쓴다. 지하철은 ‘대중교통’으로 분류되기에 그렇다 치면, 택시는 이 규정에서 빠져 있으면서 요금체계에 공적 통제를 받는다. 택시는 이런 모순 속에 대중들을 실어 나른다.

 시민들은 택시요금 인상에 난색을 표한다. 지갑이 얇아지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이런 정서를 헤아려 정치인들은 우회로를 택한다. 세금을 감면해서 LPG가격을 낮추거나, 버스전용차로 사용을 허락하는 것. 민주당은 택시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마련한다고 재빨리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지자체의 사업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택시기사의 월평균 소득이 200만원 정도는 되도록 원천적 구조개선을 해줄 일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1만 달러 국민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계 최장노동시간 보유자들에게 말이다. 택시요금 인상은 물론 ‘시민안전 업무수당’이라도 신설해서 무사고 안전운행을 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시민들에겐 득이다. 거스름돈을 팁으로 주는 것도 방법이다. 안전은 공익이다. 값싼 택시비, 기사들의 분노가 거리 안전을 그늘지게 하는 것을 방관할 때가 아니다. ‘가로수를 누비며’ 명랑운전은 옛말, ‘벗어날 수 없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의 어두운 미로를 누비며’다. 필자는 1만원권 지폐로 남은 거스름돈을 차마 받을 수 없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바로잡습니다 위 칼럼에서 “택시요금이 10년째 묶여 있다”는 부분은 2009년 모든 택시비가 인상됐었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