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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 간첩 누명 쓰고 종신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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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호 28면

반유대주의와 ‘반 셈 주의’는 동의어다. 독일의 기자 겸 작가였던 빌헬름 마르(1819~1904)는 1879년 자신의 저서 게르만주의에 대한 유대주의의 승리에서 반 셈 주의(Antisemitismus)란 라틴어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마르는 무신론자 아나키스트였다. 평생 네 차례의 결혼 중 두 번을 유대인 여성과 했다. 하지만 유대인을 증오했다. 사실 반 셈 주의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셈족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랍인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차지하는 아시케나지는 셈족이 아닌 다양한 중·동부 유럽인의 혼혈이다. 그래도 오늘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반 셈 주의는 유대인만이 대상이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반유대주의 희생양 알프레드 드레퓌스

영재학교 졸업해 군부 엘리트 된 죄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이 집단으로 물리적 박해를 당한 사례는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반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대표 주제다. 주인공 알프레드 드레퓌스(사진)는 1859년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알자스는 시대별로 독일·프랑스 간의 영유권 분쟁에 휘말린 지역이다. 명석하고 공부 잘한 그는 프랑스 영재교육기관 중 하나인 에콜 폴리테크닉(EP)을 졸업했다. EP는 나폴레옹이 설립한 이공계 최고 명문이지만 적지 않은 졸업생이 군장교로도 복무한다. 드레퓌스도 졸업 후 포병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정보 분석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894년 9월 프랑스 방첩대는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청소부로 위장 취업시킨 한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독일에 전달된 프랑스 군사기밀문서를 입수한다. 이 문서가 프랑스군 참모부 근무자에 의해 유출됐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군 당국은 즉시 내부 감찰에 착수했다. 국방장관 오귀스트 메르시에는 참모부의 유일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대위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드레퓌스는 충분한 조사 없이 단지 그의 필적이 유출 문서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뒤집어썼다. 대다수 군 장교와 보수 언론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므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다고 단정하고 그를 간첩으로 모는 데 가담했다. 체포된 드레퓌스는 재판에서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1895년 3월 12일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로 유형을 떠난다. 영화 ‘빠삐용’(1973)에도 등장한 오지다.

2년 뒤 조르주 피카르 대령이 참모본부 방첩대장으로 부임해 사건을 재조사한다. 수사결과 진범은 페르낭 에스테라지 소령임이 밝혀졌다. 당황한 프랑스 군부는 귀족가문 출신인 에스테라지를 반역죄로 처벌하면 군부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진실을 밝혀낸 피카르에 대해 오히려 군사기밀 누설 혐의를 씌워 튀니지 주둔 사령부로 좌천시켰다. 에스테라지는 자신의 범행을 극력 부인했고 또 참모본부는 그의 허위 진술을 묵인했다.

문인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일간지 ‘로로르(L’Aurore, 새벽)’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제하의 펠릭스 포르 대통령 앞 공개 서신을 기고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내용이다. 문인 아나톨 프랑스와 사회주의운동의 기수 장 조레스 등 여타 프랑스 지성인들도 졸라와 뜻을 같이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드레퓌스는 1899년 6월 30일 항소심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됐다. 1906년 프랑스 대법원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최종 확정했다. 이어 복권돼 소령으로 군에 복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도 받았다. 남미 오지 수형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드레퓌스는 중령 진급 후 자진 전역했다. 파리 근교에서 요양하던 그는 193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반유대주의의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종교적 요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모두 뿌리가 같은 유일신교다. 그렇지만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는 예수를 죽음으로 몬 배후는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다. 유대인은 유럽 각국에 붙어살면서도 선민의식에 가득찬 교만함을 보였다. 숙주국(宿主國) 사회환경에 일정 수준 순응하고 동화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한 신앙과 문화 전통을 고수했다. 그래서 공동체의 화합은 거부하고 오로지 이익만 취하려는 사악한 집단으로 인식돼 기독교 사회의 혐오 대상이 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소수인 유대인은 유럽 각국에서 유랑하면서도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부는 주류 사회에도 진출하고 또 지도층으로 행세하려 했다. 주객 관계를 혼돈한 것이다. 기독교 사회 구성원의 질시와 증오를 유발했다. 드레퓌스도 비슷한 경우다. 그가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입학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영재학교를 마친 후 프랑스 주류가 장악한 군부에 장교로 들어가 두각을 나타낸 것이 많은 프랑스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시온주의 태동 반유대주의도 맹위
드레퓌스 사건이 미친 영향은 컸다. 우선 시온주의 태동을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 일간지 파리 특파원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심층 취재한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럽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후일 이스라엘 건국의 이념인 시온주의 운동의 기수로 나섰다. 그리고 프랑스에선 국가가 조작한 반유대주의가 프랑스 지성의 항변으로 좌절됐지만 다른 유럽국가에선 반유대주의가 더욱 맹위를 떨쳤다. 19세기 말 러시아와 동유럽엔 국가 공권력이 개입한 집단적 유대인 박해인 포그럼이 일어났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반인륜 재앙인 ‘쇼아(홀로코스트)’를 연출해 유대인을 대거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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