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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봐라, 우리만 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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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유권자들로부터 심한 압력을 받고 있다.”

 13일 그리스 아테네 시그로가(街)에 있는 친(親)유럽 성향의 중도우파인 신민당사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외신담당 대변인 시리즈 비카치크는 “갑자기 폭탄이 터진 듯하다”고 말했다. 재선거(17일)를 코앞에 두고 스페인이 재정 긴축 없는 구제금융을 받은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비카치크 대변인은 “허리띠를 졸라매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게 우리 당의 입장”이라며 “그런데 독일이 이중 잣대를 적용했다”고 했다. 스페인엔 좋은 조건으로, 그리스엔 가혹한 조건으로 급전을 빌려줬다는 얘기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권자들이 전화를 걸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이날 의사당이 있는 아테네 신타그마(헌법) 광장에서 만난 회사원 나타사 테오도로코폴루는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선 긴축은 피할 수 없는 줄 알았다”며 “하지만 스페인을 보니 그렇지 않아 우리만 당한 듯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유권자들의 정서 때문에 신민당과 중도좌파인 사회당은 서둘러 입장을 바꾸고 있다. 옛 여당인 신민당 대표인 아토니스 사마라스는 11일 “우리도 트로이카와 재협상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트로이카는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이다. 사라마스는 13일에도 “어떤 경우에도 세 번째 총선을 해서는 안 된다”며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거국 정부 구성을 요구했다.

  줄기차게 재정 긴축 조건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급진좌파연합은 스페인 구제금융 이후의 들끓는 여론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급진좌파연합 당사에서 만난 기아니스 드라가사키스 유럽정책 담당은 “우리의 재협상 주장이 옳다는 게 증명됐다”며 “우리가 제1당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급진좌파연합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12일 2차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미 합의된 구제금융 조건을 폐기할 방침임을 재확인했다. 그는 “ 유로존 나라 중 하나라도 무너진다면 그 불길은 그리스와 남부 유럽 국가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유로존을 해체할 것이며 어느 누구의 이익도 아닐 것”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협박이 분명한 말을 해놓고도 그는 “우리는 (유럽의 동료를) 협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어느 당도 과반수를 얻기 힘들어 보인다.

1, 2위를 다투는 신민당과 급진좌파연합의 지지율은 20%대로 비슷하다. 1차 총선과 마찬가지로 정부 구성 자체가 난항을 겪을 듯하다. 결국 사회당 베니젤로스 당수가 제안하고 신민당 사라마스 대표가 호응한 거국내각이 가장 유력한 대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 정당이 주도권을 쥐고 정국을 이끌지 못하니 고통스러운 긴축정책을 밀어붙이기 힘든 구조다.

 이제 공은 독일로 넘어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리스인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거부하면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 커진다. 스페인 선례가 거부를 어렵게 하고 있다. 자충수를 둔 셈이다.

 EU의 위기 대응력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시장 충격이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이 결국 스페인의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 탓에 스페인 국채 매물이 쏟아졌다. 12일 스페인 10년물 국채금리는 유로존 출범 이래 가장 높은 6.8%까지 치솟았다. 이는 아일랜드·포르투갈·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의 금리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이날 CNN 방송에 출연해 “유럽 지도자들이 유로화를 구할 추가 대책을 3개월이 넘기 전에 내놓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헤지펀드 투자가 조지 소로스도 “유로존을 구할 시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었다.

 금융시장에선 유럽 ‘눈치 보기’ 장세가 이어졌다. 13일 한국 코스피지수는 4.58포인트(0.25%) 오른 1859.32로 마감했다. 원화가치는 2.1원 오른 1168.4원이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글로벌 경기불안으로 시장의 급격한 침체 등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실물경제의 급락 조짐은 아직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일부 업종의 경우 경기불안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 공급과잉 지속 등으로 시장 불안정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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