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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왜 히딩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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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직
변호사

평소 축구에 전혀 문외한이라서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있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만 해도 전·후반 90분을 다 본 경기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만은 달랐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인 2002년 6월, 히딩크 감독을 앞세운 한국 축구팀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들을 연달아 격파했다. 그러니 어찌 환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일부 지식인들이 월드컵이 가진 제국주의적·상업주의적인 속성을 경계하고, 축구공을 만드는 빈곤한 나라 어린이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을 폭로하고, 수백만 명이 광장에 모여 ‘대ㅡ한민국’을 외치는 광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경향과 맹목적인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지만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월드컵 경기에 빠져들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도대체 “뭣 하는 사람인가”. 즉 히딩크 감독은 ‘그때’까지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세계적인 명감독으로 활약을 했는데, 축구선수로서는 그다지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의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유능한 축구선수라고 한다면 축구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감독이 되어 그동안 익힌 지식과 기술을 후배 선수들에게 가르침으로써 명감독이 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훌륭한 선수가 되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 나 자신 곰곰이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아 이것이구나” 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게 되었다. 그 어떤 기발하고 특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의 능력은 다르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실이었다. 축구만 놓고 보더라도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축구 경기를 운영하는 행정가로서, 중계를 하는 아나운서로서, 해설을 하는 해설가로서, 독자들과 시청자들에게 경기 내용을 전달하는 기자로서 각기 맡은 역할이 있고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각각 다를 뿐 그들 사이에 수직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축구 선수와 유능한 감독이, 최고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해설가가, 말솜씨가 좋은 아나운서가, 내용을 잘 전달하는 기자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사회를, 세상을 보자 그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온갖 기질과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있고, 갖가지 직업이 있지만 그들 사이에, 그 직업들 사이에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차이는 없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흔히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는 현실을 은폐하는 위선적인 언사가 아닌가 하는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냉소적인 태도가 참으로 잘못된 것이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지역에서 변호사로 생활하다 보면 이런저런 조직과 그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리더로 적합한 사람, 기획하는 데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능력은 없는 것 같지만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 그저 사람이 좋아 조직의 외연을 넓히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사람 등등과 마주치게 된다. 이렇게 우열이 아닌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조직이 무난하게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하나의 훌륭한 축구경기를 위해서는 감독만이 아닌 선수가, 아나운서가, 해설가가, 기자가, 행정가가, 그리고 관중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계적인 질서로 촘촘하게 구성된 제도에 균열을 내는, 각자가 개성적인 인간으로 스스럼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함에도 내신과 수능에 ‘올인’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오늘도 학원을 전전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기성세대의 하나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이영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