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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공이 향하는 쪽으로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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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아이스하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웨인 그레츠키(Wayne D. Gretzky). 1980년부터 8년 연속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의 MVP에 오른 선수다. NHL 모든 구단이 그의 등번호 9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할 만큼 신화로 남은 인물이다. 그에겐 ‘위대한 자(Great one)’의 칭호가 붙었다. 스포츠채널 ESPN이 미국민들을 대상으로 ‘스포츠 영웅’을 조사한 결과는 놀랍다. 24%가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을 지지한 반면, 무려 76%는 그레츠키에게 몰표를 던졌다. 그레츠키는 경기 비법을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퍽(puck: 아이스하키 공)이 있는 곳으로 쫓아가지만, 저는 퍽이 향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유럽 경제위기가 또 말썽이다. 그동안 세계는 진실과 설익은 기대가 뒤섞인 판타지에 현혹됐을 뿐이다. 이미 돈은 철저히 현실에 따라 움직여 왔다. 누구도 시장(市場)을 이길 수는 없다. 돈이 빠져나간 그리스는 기술적 디폴트에 빠졌고, 스페인은 구제금융에 손을 벌렸다. 그 나라 사정은 그 나라 국민이 제일 잘 아는 법이다. 두 나라 국민들은 거리에 나와 ‘긴축 반대’를 외쳤지만, 뒤로는 예금을 빼내 안전한 독일 국채 사재기에 바빴다. 두 나라 은행에 뱅크런이 일어나고, 독일 국채가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에 내미는 단골 처방전은 ‘통화가치 하락을 통한 경쟁력 확보’다. 대단히 친절한 충고로 보인다. 유로존을 이탈하지 않으면 독일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가 예전의 드라크마 화폐로 돌아가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재앙이다. 통화가치는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하고, 끔찍한 인플레이션이 닥친다. 아르헨티나·아일랜드·러시아가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그리스 노인들은 앉아서 연금이 반토막 나고(유로화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선진국(현재 2만7875달러)에서 중진국으로 꼬라박힌다. 긴축을 못하겠다는 그리스가 죽어도 유로존 잔류를 우기는 이유다. 겁나는 것이다.

 스페인의 구제금융 역시 진통제에 불과하다. 잠시 유동성 위기는 잠재울지 몰라도 취약한 국제경쟁력에다 재정 위기, 부동산 거품 붕괴라는 고질병은 고스란히 남는다. 똑같은 고민의 이탈리아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현재의 구도 아래서는 유로존이 시간을 두고 돌아가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돌아보면 유로 주창자들은 순진했다. 오히려 회의론자들이 옳았다. 유로화가 등장하면 다른 나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독일만 살판날 것이란 암울한 묵시록이 부활하고 있다.

 유럽 앞에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제3의 길은 없다. 하나는 독일이 인플레를 각오하고 유럽중앙은행(ECB)을 통해 유동성을 과감히 푸는 것이다. 리먼 사태 이후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밟은 길이다. 다른 하나는 남유럽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다. 강력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통해 임금 삭감과 물가 하락을 받아들이는 고난의 선택이다. 경쟁력이야 회복되겠지만 그 고통을 감수할지 의문이다. 일찌감치 외환위기 때 우리가 금 모으기를 한 것처럼….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유럽의 시대가 끝물 조짐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별명이 ‘대책반장’인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일찌감치 “그리스의 디폴트는 불가피하고, 유럽 재정위기도 2~3년은 더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우리 외환위기처럼 대기업 빚 때문이든, 유럽처럼 나랏빚 때문이든 나라 전체의 고통은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남유럽은 긴축에 대한 의지를 잃었고, 독일은 지긋지긋한 버티기에 인내심이 바닥났다. 유럽의 비극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유럽 위기도 아이스하키처럼 퍽만 보다간 큰 그림을 놓친다.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약한 꼬리만 뒤쫓기 십상이다. 오히려 그레츠키처럼 퍽이 향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김 위원장의 “유럽 위기는 대공황(大恐慌) 이후 가장 큰 충격일 것”이란 경고가 결코 경솔한 발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유로존이 서서히 해체 쪽으로 향하는 분위기다. 또 한번 우리에게 큰 쓰나미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