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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버럭 해찬’호 민주당, 어디로 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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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엄동설한의 유신 시절, 캠퍼스에 전설적인 얘기가 떠돌았다. 민청학련 사건의 대장 격인 이철은 변장술에 능해 경찰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는 것, 역시 같은 사건에 연루돼 1974년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인태는 판사가 ‘사형!’이라고 외치는 순간 졸고 있었다는 웃지 못할 무용담이었다. 이해찬에 얽힌 일화도 인기를 끌었다. 무섭기로 정평이 난 교수가 유신 반대 데모를 진두지휘하는 이해찬 학생을 말리다 못해 따귀를 올려붙였는데 ‘그래도 해야겠습니다!’는 짧은 답변을 남기고 돌아섰다는 얘기였다. 그 호랑이 교수는 유신 끝무렵 세상을 뜨셨는데, 이해찬은 정치로 떴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된 소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행동대장’이 그의 첫 번째 정치적 직함이었다.

 물론 ‘행동대장’이란 당시 사건 조작을 총괄한 보안사령부가 편의상 붙인 이름이었겠지만, 요즘식으론 전략기획실장쯤이었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력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전사였다. 수감생활 내내 그는 ‘광장서적’을 운영했고, 출감 후에는 곰탕집을 꾸려 생계를 유지했다.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기질이 선택한 80년대식 방식이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출범은 그에게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정치적 광장을 열어주었다.

 이른바 대학 입시에서 ‘해찬세대’로 불리는 수행평가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본고사 폐지, 수행평가와 등급제가 전격 도입되었다. 중·고등학교에 난리가 났다. 교원 정년 단축이 시행돼 2만 명이 퇴출됐고, 교장 임명제가 선출제로 바뀌었다. 전교조가 약진했다. 대학도 분주해졌다. 이름도 낯선 ‘브레인 코리아 21’(BK21)로 느슨했던 대학이 경쟁체제로 돌입했다. 교수 업적심사도 강화됐다.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의장 시절에는 의약분업을 강행했다. 10만 의사들의 전면 파업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결국 의사들이 손을 들었다. 그는 노무현 정권 시절 실세 총리로 등극했다. 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한 대통령의 돌발적 발언에 각을 세우기도 했고, 한나라당에 원색적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말발로 ‘나꼼수’급인 정두언 의원은 밥값 하는 총리로 이회창·이해찬 총리를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해야겠다!’는 청년 시절의 기질이 구축함 같은 돌파력과 탱크 같은 실천력으로 진화한 것이다. 제갈량의 꾀와 조자룡의 무예를 두루 갖춘 그에게 빠진 것이 있다면 유비의 너그러움이다. 지장과 용장의 면모까지는 칭찬을 받을 만한데 덕장의 여유가 없다. 자주 불같이 화를 낸다. ‘버럭 해찬’이 달리 나온 게 아니다. 지난주 화요일, 그는 YTN과의 생방송 인터뷰 도중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임수경 의원의 막말과 북한인권법에 관한 질문이 쏟아진 후였다. ‘계속 이렇게 하실 겁니까?’- 불편한 질문에 대한 그의 항의였다. 대표수락 연설에도 공격적 어법이 튀어 나왔다. ‘박근혜 새누리당은 매카시즘을 그만두라’고 했다.

 이쯤 되면 약간 걱정이 앞선다. 한명숙 전 대표의 흐릿한 리더십에 좌절감을 맛본 당원들이 칼날 같은 리더십을 원한 결과이겠지만, 정작 이해찬 신임 대표가 천명한 대권 탈환의 핵심 강령은 저돌적 공격보다는 전술적 타협, 혹은 우회적 조정이 더 성공할 듯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 각각의 내부에 엄청난 이념갈등과 이익투쟁이 잠재된 시대적 난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답안을 그는 이미 갖고 있을지 모르겠다. 마치 수학문제를 풀 듯이 말이다. 이해찬호(號) 민주당의 대권 방정식은 이렇다. 대권 탈환=f(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

 모두 보수정권의 아킬레스건이자 이명박(MB) 정부가 내팽개친 쟁점들이다. 그런데 경제학처럼 ‘모(母)조건이 동일하다면’ 저 대권 방정식은 그런대로 풀릴 수 있겠는데, 현실세계는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사회학은 ‘모든 조건은 항상 동일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해찬 대표도 그렇게 배웠다. 동일하지 않은 조건 중, 가장 위협적인 조건이 발생했다. 유럽발(發) 금융위기. ‘대공황 이후 가장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김석동 금융위원장의 경고가 약간 과장된 것일지라도, 조선·자동차·가전 등 주력 산업의 매출이 급감하고 주요 기업들이 비상경영체제로 돌입할 정도라면 아무래도 대권 방정식의 조건이 심상치는 않다.

 경제민주화는 재벌의 소유권 제한과 독점 해체, 내부거래 규제를, 보편적 복지는 5년간 300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재정 투입을 필요로 한다. 성장동력이 지속적으로 가동돼야 복지 재정도 조달 가능하다. 성장동력이 꺼진 그리스는 호스피스의 최후 선고만 남았다. 대권 방정식의 최대 조건인 성장동력을 망가뜨리는 퍼펙트 스톰이 다가오고 있다면, 이해찬호 민주당은 항로를 약간 변경할까, 아니면 폭풍 속으로 항진할까? 한국 경제의 명줄을 쥔 글로벌 불황은 ‘계속 이럴 거야?’라고 성낸다고 돌아서진 않는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