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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모들 처절한 불안은 근대의 산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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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의 내 글 ‘에디톨로지’를 넘기면 바로 ‘시인의 음악읽기’라는 연재코너가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인 김갑수는 나만 보면 고등학교 다니는 자기 아들 자랑이다. 전교 회장에 전교 일등, 각종 대회 일등을 도맡아 한다며 내 속을 긁어댄다. 솔직히 난 김갑수의 삶에 부러운 게 전혀 없다. 시인의 음악읽기? 시인은 무슨 개뿔! 김갑수는 20년 전에 시집 한 권 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온종일 지하실에서 퀴퀴한 음악만 듣는다. 그가 쓰는 글의 내용도 죄다 고독이고 슬픔이다.

네모 반듯한 그의 얼굴보다는 달걀같이 동그란 내 얼굴이 훨씬 매력적이다. 내 주장이 아니다. 우리 둘을 아는 수많은 여인들의 의견을 통계학적으로 요약한 결과다. 도무지 내가 그를 부러워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속이 무지하게 쓰리다. 단지 아들 성적 하나로 나는 시인 김갑수에게 바로 꼬리 내린다. 아, 도대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는 시인과 나의 개별적인 인간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아주 오래된 ‘역사적 모순’이다. 내 대학시절 이념논쟁의 핵심이었던 ‘민족모순 대 계급모순’의 문제만큼이나 뿌리 깊은 문제다(이런 종류의 역사적 모순은 여간해선 해결되지 않는다. 요즘 시끄러운 통합진보당 사태도 이 오래된 논쟁의 산물이다).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들은 기회만 있으면 학교폭력, 왕따, 입시지옥과 관련된 청소년 문제에 관해 목소리를 높인다. 교육정책의 좌충우돌, 젊은 선생님들의 자질부족, 가정교육의 부재 등등. 그러나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두 다 알면서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불안’이다. 자식을 둔 부모는 모두 불안하다. 부모의 실존적 본질은 ‘불안’이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 자식이 경쟁에서 뒤처져 ‘후진 대학’에 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다. 요즘 우리 둘째 아들놈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아서 그런다. 전적으로 엄마를 닮은 첫째는 성격은 무척 좋다. 공부는 별로였다. 그래도 지난해 녀석이 대학에 입학한 게 나름 기쁘고 기특해서 사방에 자랑하고 다닌다. 그러나 아들이 다니는 대학 이름을 대면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첫째와는 달리, 성격이 나를 꼭 빼닮아 건방지고 교만하기 그지없는 둘째는 그래도 좀 나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보고 오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만만해 한다. 하나 정작 성적표를 받아보니 뒤에서 몇 손가락 안이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책까지 쓴 입장이라 내색도 못하고 아주 환장할 지경이다. 그래도 녀석이 전혀 기죽지 않으니, 좀 나아지리라 기대해 보지만 엊그제 받아온 성적표 또한 여전히 뒤에서 세는 게 훨씬 빠르다.

아내가 아들의 학교담임, 학원선생 등과 면담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연히 불안해진다. 학부모들 모임에 다녀온 후에 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심란해진다. 불안을 넘어서 거의 공포 수준이다. 나는 심리학 박사다. 문화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석사 때의 전공은 발달심리학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불안할 정도면 보통의 다른 부모들은 도대체 얼마나 겁날까? 그렇다고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강남 엄마들의 치맛바람처럼 철없는 부모의 허영으로 환원시켜 우습게 취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실인식이 아니다.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통찰
전국 아이들을 일렬로 줄 세워, 전체 일등부터 수십만 번째의 꼴찌까지 등수를 매기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에서 중간 뒤쪽에 산만하게 서 있는 자신의 아이를 불안해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 그러나 이 부모의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앞선 연재에서 반복해서 설명한 근대 일원론적 발달관이 사회문화적 현실에서 구체화된 결과다. 근대의 산출물인 아동, 청소년의 개념 자체가 부모의 불안을 동반한 개념이란 이야기다.

프랑스의 문화사가 필리프 아리에스의 저작을 통해 가족개념, 아동교육의 이념 등이 어떻게 구성되고 편집되었는가를 살펴보면 한국 부모들의 이 처절한 불안은 당연한 현상이다. 수백 년간의 서구 근대화를 단 몇십 년에 단축한 한국사회에서 일원론적 발달관은 더욱 응축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압축, 축약은 어쩔 수 없이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교육문제도 이런 문화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압축성장을 겪은 부모세대가 죽고 없어져야만 비로소 사라지는 현상이다.

‘불안’과 같은 개인의 정서를 역사, 문화적 편집의 결과로 바라보면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가 사뭇 흥미로워진다. 이런 인식을 가능케 한 대표적 역사가로 ‘문명화 과정’을 쓴 독일의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와 프랑스의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를 들 수 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에서 비롯되는 상상적 발달관이 궁정의 식탁예절과 같은 구체적 행위를 통해 실재하는 현상으로 구현되는 과정에 관해 탁월하게 서술한 엘리아스의 문명사 서술방식과 ‘사소한 삶’에 관한 역사 인식을 가능케 한 ‘아동의 탄생’ ‘죽음 앞의 인간’ 등을 쓴 아리에스 역사 서술 방식은 서로 매우 닮아 있다.

강단 사학자들로부터 ‘일요일의 역사가’라는 다소 모멸적 명칭을 얻은 아리에스의 역사 서술을 대개 ‘심성사(心性史, histoire des mentalites)’라고 부르지만 ‘문화심리사(文化心理史)’라고 부르는 게 훨씬 적절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얼핏 이름도 비슷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공통점은 발달, 혹은 발전의 근대사적 강박은 아주 우연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통찰에 있다. 인간의 의식을 가능케 하는 각종 근대 개념이 역사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탄생, 즉 만들어졌다는 구성사적 역사관이다.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역사관과 그런 서술 자체가 편집되고, 만들어진다는 구성주의적 역사 인식은 서로 극과 극에 서 있는 세계관이다. 이런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객관주의, 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을 가능케 하는 메타적 관점을 동시에 편집해 내는 고도의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의미들의 ‘생성’과 ‘탄생’에 관한 역사 서술의 메타적 편집테크닉은 푸코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에 이른다. 실제로 푸코는 아리에스가 없었다면 자신의 책을 출판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읽히고 있는 푸코의 대표작 광기의 역사는 당시 대부분의 유명 출판사로부터 매번 퇴짜를 맞았다. 때마침 플롱 출판사에서 출판기획을 맡고 있었던 아리에스가 우연히 그의 원고를 읽었다. 그는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책의 출판을 고집해 결국 푸코의 첫 대저작인 광기와 비이성: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아리에스와 엘리아스는 ‘죽음의 편집역사’에 관해 경쟁적으로 저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리에스가 쓴 죽음 앞의 인간은 서구사회에서 죽음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관해 아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 인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공개되고,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경험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부터 죽음, 시체, 해골 등을 무서워한 게 아니었다는 거다. 근대 이후, 죽음은 은폐되고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되었다. 또한 죽음은 우리의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죽음의 개인화’와 성장과 근대의 단선론적 발달론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이념적 연관관계가 있다.

엘리아스는 아리에스의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의 개인화’는 죽음의 공포, 죽음의 고통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공포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콘텐트를 통해 매개되고 재생산되는 죽음에 관한 공포와 두려움은 이러한 문화사적 편집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근대 이전에 ‘아동’은 없었다
죽음의 불안이 문화사적 편집물인 것처럼 아동과 청소년과 관련된 부모의 불안도 편집된 결과다. 이와 관련해 아리에스의 대표작 아동의 탄생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동은 없었다!’는 거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하는 아동은 철저하게 문화적 편집물이라는 이야기다.
일단, 아동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표상 자체가 근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근대 이전의 가내수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가족은 재화의 생산을 위한 경제의 기본단위였을 따름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목적은 오로지 생산력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내용이 사뭇 다르다는 이야기다. 비고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부일처제에서의 ‘사랑과 질투’의 감정과 일부다처제에서의 ‘사랑과 질투’의 감정이 질적으로 다른 감정인 것처럼, 아동에 대한 부모의 사랑 또한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인 것이다.

오늘날의 핵가족에서 아이는 언제나 가족의 중심이다. 기껏해야 한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모의 모든 관심과 사랑은 아이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는 아프리카, 남미의 가난한 나라에서 아이의 존재는 전혀 다른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은 나라에서 ‘모성’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구태여 지구 반대편의 낯선 나라를 살펴볼 필요도 없다. 형제가 아홉, 열은 기본이었던 이전 세대만 살펴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아기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부모가 처음부터 그리 큰 정서적 몰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아이가 아프면 괴롭고, 아이가 죽으면 못 견디게 슬펐다. 그러나 그 슬픔은 바로 잊어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정서였을 따름이다. 부모를 필요로 하는, 굶주리고 헐벗은 또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죽어도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먹고, 입고, 살아야 했다.
아이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다. 부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오늘날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랑과 결혼의 등식’ 또한 근대 이후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한발 더 나가자면, 오늘날 여성잡지 별책부록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주제인 ‘사랑과 섹스의 관계’ 또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적 편집물로 볼 수 있다. ‘사랑해야만 섹스한다’는 강박은 생산 단위로서의 가족이 해체되고 애착관계의 기본단위로서의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아동 개념의 편집과정에 관한 아리에스식 통찰은 한국의 ‘청소년’ 개념의 편집과정에 대한 추론을 가능케 한다. ‘기러기 아빠’와 같은 아주 독특한 문화적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 한국 부모의 불안은 한국에서만 유별나게 편집된 ‘청소년’ 개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불안에 견디다 못한 부부가 탈출구로 선택한 ‘기러기 아빠’의 한국적 부부관계에서는 ‘사랑과 섹스’의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은가? 다음에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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