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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하버드 수석졸업 한국인 "최고의 일탈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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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진씨가 하버드대 졸업 앨범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학사모를 쓰는 듯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초등학교 때 벌을 서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박종근 기자]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비행기를 탔다. 반 친구들 서른 명 중 해외여행 한번 못해 본 아이는 혼자였다. 아버지를 졸랐다. 결국 방학 때 한 달간 미국 동부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뉴욕·필라델피아 등을 구경하면서 예일·MIT·하버드대를 둘러봤다. 유독 하버드대가 가슴에 남았다. 어린 마음에도 ‘환상적이다’ 싶었다. ‘내가 과연 올 수 있을까’ 싶던 생각이 어느새 커져 있었다. ‘내가 꼭 여기 와야겠다’고.

 그리고 10년 뒤, 진권용(20)씨의 꿈은 더 큰 열매를 맺었다. 그는 지난달 24일 열린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전체 수석(The highest ranking undergraduate)을 차지했다. 졸업생 1552명 중 두 명이 받는 영예였다. 졸업 학점은 4.0 만점에 4.0. 최우등 졸업생에 선정됐고 경제학과 수석상, 최우수 졸업논문상도 받았다. 미국 로스쿨 입학자격 시험인 LSAT에서도 180점 만점에 179점을 얻어 지난해 12월 예일·하버드대 로스쿨로부터 일찌감치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읊기도 숨찬 이력. 부러움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학력고사에서 만점을 받은 수험생의 기사에 늘 눈길이 가는 이유와 비슷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뻔한 말을 들을지라도.

 인사를 마치자마자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뭔가 주섬주섬 꺼내 보였다. 하버드대 수석졸업에 대한 증명서였다. 인터뷰 날 아침 학교로부터 받은 서류란다. 함께 온 진씨의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석 졸업 기사의 댓글을 보면 하버드대에 수석 졸업이 어디 있느냐, 다 학력 뻥튀기다 뭐 이런 말들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학교는 몰라도 하버드대는 있다. 소피아 프룬드 상(Sophia Freund Prize)이라는 이름이다.” 그러면서 사람들 중에 ‘수석 졸업했다’고 해놓고 나중에 공격이 들어오면 ‘하버드대엔 그런 게 없다’고 발뺌하는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무책임한 ‘학력 위조 논란’이 끊임없는 이슈구나 싶었다. 어찌됐든 일단 분위기를 풀고 싶었다.

●졸업식에 참가해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수석이라고 딱히 이벤트는 없다. 각 학과 최우등 졸업(Summa cum laude)자 79명이 졸업생들 중 맨 앞자리에 앉고 별도 입장하는 정도다. 프린스턴대만 해도 고별사를 수석 졸업자가 한다던데 그런 것도 없으니까. 사실 수석 졸업인 것도 졸업식 날 아침에 알았다. 기숙사 사감님이 불러서 말해주더라.”

●올A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데, 그만큼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나.

 “마지막 기말 시험엔 좀 욕심이 났다. 그 전까지는 ‘뭐 언젠간 B를 맞겠지, 그게 언제일까’ 하고 느긋했는데 그때만큼은 이것만 잘 보면 올A겠구나 싶어 긴장됐다(웃음).”

 그가 유학 길에 오른 건 6학년 1학기를 마친 뒤였다. 교육열 높은 대치동 동네에서 친구들은 하나둘씩 유학을 떠났다. 이른바 조기 유학 1세대가 형성되던 때였다. 그도 2년 전 미국 여행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부모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나홀로 유학이었다. 그래서 미국보다 적응하기 쉬운 캐나다를 택했다. 당시만 해도 학교에 한국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유학원을 통하지 않고 학교를 골라 더 그랬다.

진씨가 대치초등학교 야구단에서 활동하던 모습.

●초등학교 6학년생이 그런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 미국 여행을 갔을 때 충격이 많았다.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영어 수업이 있었는데 막상 가서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겠더라. 맥도날드에 갔는데 햄버거 하나 제대로 못 시켰으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와는 참 많이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서울은 좁고, 또 동네도 아파트뿐이었는데 미국은 ‘멀리 퍼져’ 살았다. 이질감이 뭐랄까 호기심으로 작동하면서 여기서 공부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한국과 가장 달랐던 점은.

 “학교 체육이 일상화됐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운동하는 학생, 공부하는 학생 사이에 벽이 있고 학교에서도 운동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캐나다 학교에선 많은 아이가 3시쯤 수업 끝나고 두 시간 정도 맘껏 뛰고 저녁에는 공부하고 그랬다.”

●뭣보다 영어가 문제였을 텐데.

 “그때까지 영어 유치원이나 영어학원을 다닌 적이 없었다. 야구를 워낙 좋아해 3학년 때부터 수업 끝나면 야구만 했으니까.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게 다였다. 그래서 한두 달 정도 입 틔우는 데 고생했다. 하지만 1~2년이 지나니까 자유자재가 됐다.”

●듣고 보니 놀랍다. 비법이라면.

 “야구는 물론 축구·미식축구·아이스하키까지 계절마다 운동부에 들어 활동했다. 하루 한두 시간씩 뛰었다. 필드에서는 영어보다 운동실력이 더 중요하니까 내가 뒤처질 게 없었다. 그러면서 캐나다 애들한테 인정받고 유대감이 생겼고, 친구 사귀기도 쉬웠다.”

●그럼 어휘나 글쓰기는 해결이 안 될 텐데.

 “맞다. 어휘는 처음부터 어려움이 좀 있었다. 그래서 책이나 신문을 읽었다. 처음에는 두꺼운 단어장을 들고 달달 외웠지만, 단어의 활용이나 뉘앙스를 몰라 이내 잊어버렸다. 쓰기는 무조건 써보는 거다. 남이 쓴 좋은 에세이는 아무리 여러 번 읽어봐도 자기가 한번 쓴 것만 못하다. 쓰고 또 쓰고 선생님께 첨삭을 부탁하면 그게 최고다.”

 그가 학부 때 쓴 에세이는 교양학부 최고 에세이상인 코난트상을 받았다. 전공(경제학)도 아닌 교양생물학 수업에서 쓴 ‘수혈에 의한 변형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의 감염 위험과 정책대응’이란 에세이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글솜씨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에세이는 고등학교(필립스아카데미 앤도버) 진학 뒤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공부에는 꽤 자신 있었던 그에게 충격에 가까운 사건이 있었다. 첫 에세이 시험에서 6점 만점에 3점을 받았다. 우리로 치면 ‘미’와 ‘양’ 사이었다. 입학을 위해 봤던 토플 시험에서 300점 만점에 293점을 받았던 자신감이 무너졌다. 다시 한국에 오고 싶을 만큼 좌절했다.

●왜 성적이 확 낮아졌나.

 “한국과 미국의 글쓰기 방법, 혹은 문화가 달라서다. 미국은 자기 주장이 먼저고 나중에 근거가 나와야 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글을 쓰니까. 두 번째 시험을 봤는데도 그리 성적이 좋지 않자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기숙학교라서 선생님도 캠퍼스에서 살았다. 저녁 먹으면서 만나 지도를 부탁했다. 1년쯤 지나니 감을 잡았다.”

●보통은 슬럼프에 빠질 텐데.

 “틀렸다는 걸 알면 바로 바꿔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두 번의 실패를 겪고도 고집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울하긴 했는데 한국 친구들을 찾지 않았다. 인간적 문제였다면 말 통하는 상대가 필요했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공부벌레(nerd)라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공부에 집중했다.”

 이후에는 학업에 큰 걸림돌이 없었다. 어릴 적 목표대로 ‘하버드대’에 무난히 합격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 과목 선이수제(AP) 시험에서 11과목 전부 만점을 받은 덕분에 3년 만에 조기 졸업도 할 수 있었다.

●대학 공부는 좀 다르지 않았나.

 “수업 전후로 바로 예습과 복습을 하는 것은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바로 해결하려 했다. 처음에는 수업 중 질문하는 게 미안했다. 흐름을 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교수는 가르치러 온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시험에서 점수를 가르는 것은 미세함, 디테일이다. 궁금했지만 안 물어봐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남아선 안 된다. 하버드대처럼 수재들이 몰리고 경쟁이 치열할수록 수업 ‘대부분’이 아닌 ‘완벽한’ 이해가 중요하다.”

●잠은 얼마나 잤나.

 “큰 과제가 없을 땐 보통 7시간은 잤다. 일과를 말하자면 보통 오전 9~10시부터 오후 2~3시까지는 수업을 들었다. 그 뒤 다음날 오전 1시까지는 과제도 하고 동아리 활동과 운동을 했다.”

●가끔 술을 먹거나 게임을 하진 않나.

 “술은 한 잔 정도? 거의 먹지 않는다. 게임도 알긴 아는데 큰 흥미가 없다. 디아블로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몇 시간씩 계속 클릭을 하고 있는 게 너무 지루하다.”

●여자친구도 안 사귀었나.

 “노 코멘트다(웃음).”

●지금껏 최고의 일탈은.

 “지난해 여름 한국에 나왔을 때 퀴즈 프로에 나간 것이다.”

 진씨는 일찌감치 진로를 정했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우리나라 금융시장 선진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최근의 금융위기나 저축은행 사태에서 보듯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나 과다한 리스크 노출이 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로스쿨에서 금융 관련법을 연구해 안정적인 금융시장을 만들고 론스타 같은 외국투기자본의 횡포를 막을 정책 고안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국의 공직자는 군대 문제도 중요한데.

 “이미 신체검사를 받아 2급 현역 판정을 받았다. 로스쿨 졸업 뒤 입대할 생각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에게 물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학점으로 매긴다면? “이제 겨우 1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보자면 4.0이다. 아쉬움도 있지만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대학졸업장뿐 아닌가. 아직 7학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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