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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의 마켓워치] 주택거래 실종 … 중산층 노후 설계 꽉 막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1. 시중은행 지점장인 김모(50)씨는 요즘 은퇴 생각만 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2007년까지만 해도 걱정이 없던 그였다. 경기도 분당에 7억원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금융자산도 2억원을 쌓아놓은 터였다. 그러나 서울 잠실의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일이 꼬였다. 전 재산 9억원에 대출 5억원을 보태 14억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10년 뒤 은퇴할 때면 20억원 정도는 갈 것으로 봤다. 은퇴 이후엔 신도시의 10억원 이하 아파트로 다시 옮기고, 남는 10억원 이상을 노후 자금으로 쓸 요량이었다.

 김씨는 얼마 전 동네 부동산 중개업소를 둘러본 뒤 충격에 빠졌다. 현재 김씨 집의 시세가 떨어져 11억원이라고들 하지만 그 가격엔 보러 오는 사람도 없으니 팔고 싶으면 9억원대로 내려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집을 팔아 대출을 갚고 나면 5억원도 남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2. 공무원인 이모(49)씨는 2008년 경기도 일산 인근에 48평형 아파트를 7억원에 분양받았다. 자녀들이 크면서 32평형 아파트가 좁았기 때문이다. 현재 거주하는 아파트가 6억원이니 1억원만 보태면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런데 살던 집이 팔리지 않아 새 아파트 입주를 포기한 채 속앓이만 하고 있다. 적립식 펀드까지 깨서 넣었지만 중도금 때문에 쌓인 부채가 4억원이다. 기존 주택은 4억원대로 값을 내렸지만 거래가 안 된다.

 특별한 사례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의 중산층이 주택시장의 붕괴, 특히 주택거래의 실종 때문에 허물어지고 있다. 이제껏 그들의 재산 형성이란 게 집을 통한 것이었다. 빚을 내 집을 사고, 빚을 갚으면 다시 평수를 넓혔다. 은퇴 즈음엔 거꾸로 집을 줄여 현금을 빼 썼다. 그게 한국식 연금이었던 셈이다. 집값이 금리 이상으로 꾸준히 올랐으니 누구에게나 최고의 노후 대책이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모든 게 흐트러졌다.

 최근 주택시장 침체의 심각성을 중산층 붕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아직도 과거의 잣대와 경험칙이 판을 친다. 부동산 거래와 관련한 세제·금융상 규제를 풀었다가 집값이 다시 뛰면 어쩌겠냐는 소리가 여전하다. 사실 시장이 이미 그로기 상태에 빠져 뾰족한 대책을 찾기도 힘든 처지다.

 그러나 중산층을 살린다는 각오로 총력 대응한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니다. 정부는 주택매매가 재개되도록 남아 있는 규제들을 과감히 풀어야 할 것이다. 보금자리주택과 수도권 신도시 확대 등 주택 수요자를 착각에 빠뜨리는 시책도 접어야 한다. 기업형 주택임대 사업자를 육성·지원해 시장의 물량을 거둬들이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주택 보유자들도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주택을 팔거나 줄일 생각이라면 손해다 싶은 가격에 내놓아 매매를 성사시키는 자세가 요구된다. 평생 살면서 돈을 뽑아 쓰는 주택 연금(역모기지)도 좋은 선택이다.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현재 가격으로 집을 처분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정부는 주택연금 가입 요건(부부 60세 이상)을 중산층의 평균 은퇴 시점인 55세로 완화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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