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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 율 의자를 만난 날, 난 그의 노예가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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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44번(No.44, 1944). 아프리카 원시미술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디자인.

“언제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꿈은 (리빙) 디자인 뮤지엄을 만드는 겁니다. 제가 모아온 가구들을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죠. 제 소장품 중 한 개라도 제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어요.” 세계적인 가구 컬렉터 오다 노리쓰구(65·전 토카이예술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는 ‘지독한’ 사람이다. 여러 면에서 그렇다. 40여 년 전 잡지를 들추다가 한눈에 반한 덴마크 디자이너 핀 율(Finn Juhl 1912~89)의 의자. 그 섬광처럼 스친 순간의 인연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는 핀 율 매니어가 돼 작품을 꾸준히 모았고,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날아가 핀 율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는 지금 가구 수집가들이 ‘멘토’로 여기는 북유럽 가구 컬렉터이자 전문가다. 국내에서 1만여 점의 가구를 소장하고 있는 aA뮤지엄 김명한 관장도 오다를 “내 스승이자 멘토”라고 말한 바 있다.

가구를 수집하며 ‘디자인에 관한 책을 10권은 쓰자’고 결심했다는 그는 『핀 율』 『의자대전』『덴마크 의자』 등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썼다. 현재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핀 율 탄생 100주년 기념전-북유럽 가구이야기’(9월 23일까지, 02-720-0667)도 그의 지독한 열정이 거둔 결실이다. 그의 소장품으로 열고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오다를 만나 핀 율과 그의 인연, 북유럽 가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북유럽 가구 전문가인데, 특히 핀 율이라는 디자이너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 같다.

“그의 작품을 정말 좋아한다. 1970년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외국 잡지를 볼 기회가 많았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게 인테리어 전문회사의 카탈로그에서였다. ‘치프테인 체어’의 측면 사진이 아주 작게 실려 있었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어찌나 품격 있고, 위풍당당한 모습이던지…. 그의 작품을 직접 본 것은 그 후 1년이 지나서였다. 인테리어 숍에 전시된 ‘넘버 45번’을 보자 그때도 역시나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45번 하나만 보고도 핀 율이라는 디자이너 작품의 노예가 됐다(웃음).”

-핀 율 의자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인가.

“치프테인 의자만큼 당당하고 위엄과 지성, 그리고 품격을 모두 갖춘 의자는 없다. 또 넘버 45번은 세상에서 팔걸이가 가장 아름다운 의자다. 삼차원 곡면의 모양이 정말 우아하다. 내 친구가 핀 율의 작품을 가리켜 디테일 덩어리, 디테일의 종합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모든 디테일이 아름답다.”

-핀 율을 직접 만났다고 들었다.

“내가 핀 율 의자에 반했던 당시엔 일본에서 핀 율은 고사하고 덴마크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83년 코펜하겐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89년 5월 17일 다시 만나러 갔었다. 공항에 도착해 오후 12시30분에 시계를 맞추고 나와 저녁에 자택에 전화를 걸었더니, 바로 그날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후 12시30분에 말이다. 77세였다. 내 생일은 7월 7일인데…. 가끔은 우리 관계가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듬해 핀 율 1주기 때 일본에서 순회전을 열었다.”

‘세계적인 컬렉터’로 통하는 그인데도 인터뷰 도중 ‘컬렉터’라는 말만 튀어 나오면 펄쩍 뛰었다. 오다는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컬렉터가 아니라 연구자’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핀 율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관에서 포즈를 취한 오다 노리쓰구. 앞의 의자는 덴마크 가구 디자인의 초석을 다진 카레 클린트(1888~1954)의 작품이다.

-컬렉터가 아니라 왜 연구자라고 하는 건가.

“의자를 포함해 내 모든 소장품은 모두 연구를 위한 자료다. 예를 들면 내게 그의 작품 하나 하나는 퍼즐 조각 같다. 이것들을 하나 하나 맞춰가면서 핀 율이라는 디자이너의 전체 모습을 찾아가는 거다. 지금은 이 소중한 자료를 후세들에게 잘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과 같은 규모의 소장품을 갖게 되기까지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이 나를 만나기 전에는 번쩍번쩍하는 금시계라도 차고 나올 정도로 자산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직접 만나고는 의외라고 생각하는 눈치다(웃음). 부모님 유산으로 모은 거냐고? 절대 아니다. 대학교수로 일해오면서도 월급은 고스란히 아내에게 줬다. 의자 수집은 그래픽디자인과 원고료 등 순전히 가욋일을 해 번 돈으로 했다. 그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반드시 부자만 컬렉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게 관심이고, 내가 모은 가구들이 30~40년 전에는 지금처럼 비싸지는 않았다(웃음).”

-다른 가구와 다른, 의자만의 매력이 있다면.

“좋은 의자에 앉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지위’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가 컸는데, 나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된 욕망이 형상화된 게 의자라고 본다. 그리고 의자는 가구 디자이너에게는 도전의 대상이다. 100㎏의 사람이 앉아도, 40㎏이 앉아도 버틸 만큼 튼튼하면서도 앉았을 때 편안해야 한다. 게다가 의자는 아름다운 조각에 못지않을 만큼 자기 완결성이 있다. 텅 비어 있는 공간에 아름다운 의자 하나만 있어도 그 공간은 충분히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오다는 소장품을 700㎡(약 211.75평) 넓이의 창고에 보관한다. 공간을 3단으로 나눈 이곳에 1000여 점이 있다. 자택 역시 뮤지엄이나 마찬가지. 440㎡(약 133평) 크기의 공간에 의자 200점과 다양한 일상용품들이 채워져 있다. 그는 집에서 핀 율의 다양한 의자를 실제로 사용한다. 문제는 그의 강아지 역시 핀 율의 작품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것. 한스 베르그 등 다른 명품 의자가 있는데도 강아지는 반드시 핀 율 의자만 찾아서 앉는다고 했다. 그는 “강아지가 즐겨 앉는 펠리칸 체어에 강아지털이 붙어 강아지 체어가 됐다”며 웃었다.

-덴마크 가구 등 북유럽 가구가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

“덴마크 지역 작품들은 유럽에서는 엄밀하게 말해 시골 지역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내 수공업 형태로 만들어진 게 많다. 추운 지역이라 집안의 인테리어가 발달했고, 특히 예전에 덴마크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려면 자격증을 먼저 따야 했다. 소재에 대해 정통하고, 기계를 다룰 줄도 아는 사람들이니만큼 실력이 탄탄했다. 한마디로 손과 머리의 조화가 잘 이뤄진 작품들이 나오기 쉬운 환경이었다. 그리고 북유럽 가구에서 아주 중요한 게, 인간에게 따뜻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닿는 물건, 차가운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명작 가구의 조건 같은 게 있을까.

“첫째, 비율이 아름다울 것, 둘째 기능적일 것, 셋째 튼튼할 것, 넷째 물건과 가격의 균형이 맞아야 할 것, 그리고 다섯째 새로운 시대를 연(epoch making) 작품일 것 등이다. 가구는 오래 두고 쓰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구도 싼 것을 사서 쓰다가 유행이 지나면 버리는 추세가 강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특히 싼 값에 판매되는 물건들은 그 뒤에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만들어진다든가, 문제가 있는 소재라든가.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나만의 구매 철학을 갖고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원 낭비를 줄이고, 환경을 위해서도 그렇다. 요즘 생활문화의 질이 너무 떨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어떻게 하면 생활문화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좋은 물건에 대한 자기 철학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좋은 물건을 알아보고, 내가 좀 고생을 하더라도 구매하겠다는 마음가짐도 생긴다. 또 소중히 아끼고 쓰면서 애착도 생기고. 그런 가구는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 손자에게로 물려줄 수 있게 된다.” 

1 더블 체스트(1961). 문을 열면 화려한 색상의 서랍장이 펼쳐지고, 닫으면 심플한 양문장식장이 된다. 2 윙백 소파(1951). 사람을 편안하게 감싸안는 듯한 모양으로 2009년 다시 상품화돼 인기를 모았다. 3 암체어(1950). 큼직한 등받이와 물결 치는 듯한 팔걸이가 특징. 4 넘버 45번(No.45, 1945). 핀 율의 대표작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팔걸이를 가진 의자’라 불린다.

오다 노리쓰구가 말하는 핀 율 의자의 매력

5 펠리컨 체어(1940). 다리만 따로 떼어내고 보면 헨리 무어의 조각처럼 보일 만큼 조형미가 두드러진다. 6 치프테인체어(1949). 49년 코펜하겐 가구장인 길드전시에 출품돼 개막식에 참석한 프레데리크 국왕이 직접 앉았다고 해서 ‘왕의 의자’라 불린다. ‘치프테인’은 우두머리라는 뜻.

‘구조음치’. 핀 율과 동시대에 활동한 많은 가구 디자이너들은 핀 율을 이렇게 불렀다. 구조에 대해 ABC도 모른다며 비웃은 것이다. 건축사였던 핀 율은 자기 손으로 직접 가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공방을 운영하는 닐스 보더에게 도면을 그려주고 제작을 부탁했다. 그러나 지금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가구 매니어가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것이 바로 핀 율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다음은 핀 율 매니어인 그가 말하는 핀 율 가구의 특징과 매력.

‘나무의 서커스’라 불리는 구조의 독특함 핀 율은 건축을 전공한 사람답게 가구 제작에 대한 고정관념에 크게 사로잡히지 않았다. 예컨대 의자 몸체와 다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지지대를 대각선으로 쓰거나 프레임과 시트(엉덩이 받침대) 부분에 일부러 거리를 두어 떠 있는 듯한 구조로 만들었다.

다양한 소재를 대담하게 섞었다 핀 율은 하나의 가구에 다양한 소재의 나무를 대담하게 섞어 쓰면서도 격식 있는 멋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짙은 톤의 브라질리안 로즈우드나 티크에 메이플이나 너도밤나무와 같은 밝은 재료를 함께 썼다. 특히 큰 소파를 지탱하는 다리에서 엿보이는 가느다란 나무와 스틸 파이프 사이의 대비는 그전까지는 없었던 독특한 디자인.

‘색’을 갖고 놀 줄 알았다 핀 율은 ‘색’이라는 요소를 가구에 적극 도입했다. 의자와 소파의 패브릭을 의도적으로 다른 색상으로 섞고, 서랍의 전면에 그라데이션 도장을 하는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다씨는 “핀 율의 작품은 단아하면서도 귀족적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은 긴장감을 선사한다”며 “그 힘은 ‘무용(無用)의 용도’(쓸모없음의 쓸모)라 불리는 디테일에서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핀 율=덴마크 코펜하겐 로얄 아카데미에서 건축 전공(1930~34년). 건축사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가구장인 길드 전시에 가구를 출품하기 시작(37년)해 밀라노 트리엔날레 전시에 참여했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51년)을 열었다. 뉴욕 유엔본부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장 인테리어를 담당하고, GE·IBM사 디자인 컨설턴트, 일리노이공대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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