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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 때도 안 뚫린 방어선 … 1180원 뚫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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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원화값이 달러당 1180원 선 아래로 떨어졌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사망’도 버텼던 방어선이 무너졌다. 유럽에서 불어오는 외풍이 그만큼 세다는 얘기다.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가치는 1180.5원에 장을 마감했다. 이달 들어 3주 만에 53원이나 떨어졌다. 원화가치 1180원이 무너진 건 지난해 10월 초 이후 7개월여 만이다. 당시 그리스가 재정적자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고 선언해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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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 들어 원화값이 급락한 것도 유럽 탓이다. 그리스와 스페인에서 금융 불안이 가중되고 있지만 23일(현지시간) 모인 유럽연합(EU) 정상들은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이에 따른 실망감으로 유로화 가치가 1년10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달러화 강세)했 다.

 외환시장엔 당혹감이 흐르고 있다. 달러당 1180원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김정일 사망이란 대형 악재가 터진 지난해 12월 19일에도 원화가치는 장중 1185원까지 급락했다가 1174.8원까지 회복하며 장을 마감했다. 이에 비해 24일엔 줄곧 달러당 1170원대를 유지하던 원화값이 장 마감 직전 쏟아진 대기물량에 밀려 1180원 선을 내줬다.

 한 외환딜러는 “1180원 선이 뚫리면 하루 이틀 새 곧바로 1200원까지 원화가치가 떨어질 거라는 게 딜러들의 공통된 의견”이라며 “원-달러 환율이 1200원을 넘어서면 더 이상 고점을 예상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원화가치 하락이 가파를 수 있다는 전망이다. 그는 또 “그리스 사태가 당분간 해결되기 쉽지 않다고 가정했을 때 원화가치 하락이 어디에서 멈출 것이냐는 결국 당국의 개입 여부에 달렸다”며 “당국도 개입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원화값이 2008년 리먼 사태 때처럼 하염없이 추락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최근 원화값이 많이 떨어졌지만 예전보다 훨씬 충격을 덜 받는다”고 지적했다. “다른 신흥국보다 글로벌 악재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던 원화가치가 최근엔 브라질 등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전승지 삼성선물 외환 애널리스트도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고 뱅크런이 빚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다고 해도 달러당 1320원 선은 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외환시장의 내성이 강해진 건 “원화의 체력이 좋아졌기 때문”(전 애널리스트)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내 달러 수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사 선수금 및 해외펀드 관련 헤지 금액은 현재 2008년의 절반 또는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든 상태다. 외환보유액이 3000억 달러가 넘고 미국·중국과의 통화 스와프를 통해 안전망이 강화된 것도 시장 불안을 달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과 가계의 표정은 엇갈린다. 해외, 특히 미국에 가족을 보낸 ‘기러기 아빠’는 울상이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1만 달러를 송금하려면 53만원이 더 필요해졌다. 수출이 많은 일부 기업은 반색한다. 조선업계가 대표적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수출이 95%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원화가치 하락이 매출 증가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LG경제연구원 신 실장은 “원화가치 하락으로 인한 기업경쟁력 제고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인한 수혜가 글로벌 경기 하락보다 더 크게 작용할 수 없다”는 이유다. 그는 “다만 경기 하락과 엔고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일본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안혜리·조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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