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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세르주의 손수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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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정진홍
논설위원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피레네 산중의 대피소였다. 1410m 고지인 콜 드 르푀데(Col de Lepoeder)에 채 못 미친 지점이었다. 두어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눈보라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에만 의지해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그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버너를 켜고 코펠에 물을 끓이더니 홍차를 타서 나눴다. 비록 각자 마실 수 있는 양은 적었지만 따뜻한 홍차가 몸을 덥혀 줬다. 그리고 눈보라가 잦아들자 우리는 모두 론세스바예스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날은 추웠지만 땅은 얼지 않아 매우 질척거렸다. 마치 발에 접착제를 붙이고 걷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 진 땅 위로 선명하게 바퀴자국 두 개가 나란히 나 있었다. 누가 이 산악까지 자전거를 끌고 왔나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것이 그의 손수레가 지나간 자국인 줄 몰랐다. 그날 저녁 알베르게에서 순례자 만찬을 할 때였다. 식사 장소에 가보니 빈자리가 안 보였다. 그때 누군가 저쪽에서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자기 옆으로 오란 뜻이었다. 앉자마자 그는 나를 피레네의 대피소에서 만났다며 반가워했다. 대피소에서 사람들에게 홍차를 끓여서 나눠줬던 바로 그였다. 그때 비로소 그가 세르주(Serge)라는 프랑스인이고, 나와 동갑내기며 손수레를 끌고 순례길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음날 아침 눈이 몹시 내리는 가운데 며칠간 계속 온 눈·비로 물이 불어난 개울이 서너 차례 우리를 가로막았다. 세르주와 나는 함께 도하작전을 펼쳤다. 손수레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그와 나는 모두 신발이 젖고 말았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친구가 됐다. 물론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는 그렇게 만났다가 자연스레 헤어진다. 우리 역시 서로의 길을 축복하며 헤어졌다.

 #그후 보름 정도 시간이 지났다. 산티아고 가는 길의 절반에 채 못 미친 온타나스라는 곳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걷는데 길 옆에 바퀴 한 쪽이 빠진 채 나뒹구는 손수레가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해 가까이 가서 보니 영락없이 세르주의 손수레였다. 자세히 보니 바퀴가 빠진 것이 아니라 아예 바퀴 축 자체가 동강나 있었다. 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그냥 맞으며 한동안 그 손수레 앞에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냥 걸어오기도 힘든 이 진창길을 수레를 끌고 오려니 그는 얼마나 힘들었겠나. 오죽하면 강철 바퀴 축이 부러졌겠나 싶었다. 그냥 눈물이 비처럼 흘렀다. 목청 높여 세르주를 불러도 봤다.

 #정말이지 그의 부서진 손수레를 보니 그것이 꼭 나 같고, 우리 같았다. 바퀴 축이 완전히 부러져버린 세르주의 손수레는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포함한 한국의 중장년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기가 몸담은 조직을 위해 몸바쳐 일하다 자기 허리가 분질러지는 줄도 몰랐던 숱한 한국의 중장년들 같았다. 우리를 이만큼 먹고살게 해놓고도 대접받기는커녕 아들·손자 세대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한국의 노년들처럼도 보였다. 모두 등골이 휘어라 일했고, 그 삶의 진창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개의치 않고 자기 한 몸 위하기보다 가족과 조직을 위해 쉼 없이 달려가다 결국엔 동강나 버린 그 불쌍한 우리들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걸어온 길은 결코 잘 닦인 아스팔트길이 아니었다. 자갈밭 아니면 진창이었다. 세르주의 손수레가 온 길도 그랬다. 그래서 진창에 박힌 채 부서지고 버려진 손수레를 부둥켜안고 또 울었다.

 #그때 손수레의 손잡이에 달려 있던 망가진 경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떼어내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거든 그 경적을 울리리라 마음먹었다. 비록 고장나 바람 새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 경적이지만 나는 그래도 그 경적을 울리리라.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세르주를 위해, 또 허리 부러져라 일한 한국의 모든 가장들과 중장년과 노년들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서!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