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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26>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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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림동 계곡 중간에 떡 하니 서 있는 거연정. 울퉁불퉁한 바위위에 초석을 놓고 정자를 올린 것으로 선조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유생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었다. 괴나리봇짐에 미투리(삼·노 등을 꼬아 만든 신) 두어 짝 들고 산 넘고 물 건너 하염없이 걸어야 했다. 지금이야 건강을 위해 걷는다고 하지만, 옛 선비에겐 급제보다 더 어려운 게 과거 보러 가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남도의 유생에게 남덕유산 육십령길은 큰 고비였다. 높이 1507m나 되는 산을 60리(24㎞)나 걸어서 넘어야 했다. 그 산 초입에 경남 함양의 화림동 계곡이 들어서 있다. 험한 고개를 넘기 전 숨을 고르기에 그만인 명당이다. 정자에 앉아 한잔 술로 목을 축이고, 시 한 수 읊다 보면 고단함은 어느새 스르르 풀렸으리라. 선비들은 이곳에서 고된 몸을 추스르고 한양으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함양에는 지금도 옛 선비가 풍류를 즐겼던 정자와 누각이 100여 개나 남아 있다. 이 정자와 누각을 엮어서 만든 길이 ‘선비문화탐방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 3월 이 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한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1구간 ‘정자탐방로’와 2구간 ‘선비탐방로’로 이루어진 함양 선비문화탐방로는 경남 유일의 역사문화 트레일이다.

글=이석희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정자탐방로: 군자정~농월정 6km
계곡에 발 담근 연암 “과연 화림동”

2 팔작지붕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동호정. 3 선비문화탐방로의 마지막 지점인 광풍루. 4 정자탐방로는 데크로드를 깔아 놓아 걷기에 좋다.

화림동 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계류 사이로 너럭바위와 기암괴석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동양화 속 풍경 같은 곳이다. 화림동 계곡은 한양은 물론이고 중국에까지 이름을 알린 유서 깊은 명승지다.

이 지역 현감으로 부임했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은 “한양 사람들이 무더운 여름날 화림동 계곡에 발 담그고 족탁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과연 화림동이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함양군이 제작한 『누정기(樓亭記)』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개성 기생과 함께 말을 타고 내려와 화림동에서 풍류를 즐기고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 화림동 계곡에는 정자가 7개 있다. 이 중에서 군자정·거연정·동호정 세 곳이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나머지는 1970년대 이후 새로 올린 것이다. 군자정은 전혀 채색되지 않아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은 동호정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거연정은 들쭉날쭉한 고르지 않은 바위 위에 서 있다. 높낮이가 다른 곳에 초석을 놓고 정자를 올렸는데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아, 옛 선조의 뛰어난 건축술을 엿볼 수 있다. 정자탐방로를 조선시대 정자 건축 기법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자탐방로는 잘 정돈돼 있다. 선비문화관을 출발하면 바로 군자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계곡 중간에 떡하니 서 있는 거연정이 보인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차례로 정자가 나타난다. 영귀정을 지나 얼마 가지 않으면 농로가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사과밭과 양파밭이 나온다.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다. 곧바로 동호정 가는 길이 이어지는데 이 구간이 가장 예쁘다. 길 양옆으로 수양버들이 춤을 추고, 왼쪽 아래로는 화림동 계곡물이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굽이쳐 흐른다. 빨리 발을 담그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6 동호정 앞에 있는 차일암은 10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이다.

파릇파릇 물 오른 수양버들 가지 사이로 동호정이 들어온다. 데크로드에서 내려 징검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차일암과 동호정에 다다른다. 차일암은 100명도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다. 동호정에 올라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도 좋고, 차일암에 걸터앉아 화림동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상쾌하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옛 선비도 이 바위에서 발을 담그고 노독을 풀었으리라. 농로로 이어진 호성마을~람천정을 지나 정유재란 때 순국한 선조를 모신 사당인 황암사를 지나면 농월 유원지다.

선비탐방로: 농월정~광풍루 4km
달 희롱하던 농월정, 지금은 불 타 흔적만

‘정자탐방로’ 도착점이자 ‘선비탐방로’ 출발점은 지족당 박명부(1571~1639)가 지은 농월정과 너럭바위 월연암이다. 농월(弄月)은 ‘한잔 술로 달을 희롱하다’라는 말이고 월연(月淵)은 ‘못에 비친 달’이다. 즉 ‘못에 비친 달을 정자에서 희롱한다’는 뜻이다. 참 풍류가 넘치는 이름이다. 음력 보름 둥근달을 보면서 농월정에 앉아 술 한잔 기울이는 정취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는데, 아쉽게도 농월정은 불에 타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5 함양의 유명한 먹거리인 갈비찜. 안의면은 갈비찜과 갈비탕으로 유명하다.

월연암은 약 1000평에 이르는 펑퍼짐한 바위 덩어리다. 바위 곳곳에 움푹한 웅덩이가 여럿 있다. 옛 선비들이 바위에 난 웅덩이에 막걸리를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함양으로 답사를 오는 대학생도 가끔 옛 선비를 흉내 낸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멋을 즐기려는 마음은 다르지 않은가 보다.

이어지는 솔숲도 시원하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어울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하지만 이어지는 농월정교부터는 걷는 재미가 떨어진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농월정교도 그렇고, 월림마을~구로정으로 이어지는 농로도 그렇다. 구로정은 1854년 한 해에 태어난 선비 9명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는데, 후손들이 최근 지은 정자여서인지 옛 정취를 느끼기는 힘들다.

농월정에서 농로와 아스팔트 길, 금천변을 따라 한 시간 넘게 걷다 보면 선비탐방로 끝 지점인 오리숲과 광풍루(光風樓)에 이른다. 오리숲은 금천변 제방에 만들어진 갯버들 숲으로 연암이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만든 숲이다. 연암이 “둑 길이가 오리나 되니 오리숲이고 오리가 내려앉으니 오리숲”이라고 했다는데, 연암이 평소 존경하던 청백리 이원익 대감의 호가 오리(梧里)인 것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는 설도 있다.

광풍루는 조선시대 오현(五賢) 중 한 명이었다는 정여창(1450~1504)이 현감으로 부임해 중수한 누각이다. 2층에 올라서면 금천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여 년 전 연암이 광풍루에 자주 올라 백성을 염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길 정보=함양 선비문화탐방로는 10㎞ 남짓 거리다. 선비문화탐방로 1구간인 ‘정자탐방로’는 선비문화탐방관~군자정~동호정~호성마을~람천정~황암사~농월정을 거치는 길로 6㎞쯤 이어진다. 데크로드·농로·징검다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선비탐방로’란 이름이 붙은 2구간은 농월정에서 월림마을~구로정~오리숲~광풍루에 이르는 4㎞의 길이다. 1구간에 비해 조성이 덜 돼 있지만, 올 연말까지는 정비를 마칠 계획이다. 선비문화탐방로 1, 2구간을 다 걸으려면 넉넉히 네 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경치가 워낙 좋아 넋 놓고 쉬는 시간도 염두에 둬야 한다. 함양군청 문화관광과(055-960-4132)로 연락하면 문화관광해설사와 동행할 수 있다. 함양은 갈비탕으로 유명하다. 안의면이 그 중심지로 예부터 큰 우시장이 섰다. 함양 갈비탕은 한우 암소갈비만 사용하고 다른 뼈는 넣지 않아 국물이 맑고 개운하다. 안의원조갈비집(055-962-0666), 금호식당(055-964-8041), 삼일식당(055-962-4492)이 유명하다. 갈비탕 1만원, 갈비찜(소) 4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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