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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청은 애국자…미 망명 안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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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제롬 코언 교수(왼쪽)가 2003년 중국에서 천광청과 면담하고 있는 모습. [사진 뉴욕대]

“그는 언젠가 중국의 간디(인도의 건국 아버지·1869~1948) 같은 인물이 될 것입니다.”

 중국의 시각장애 인권변호사 천광청(陳光誠·진광성·41)을 미국으로 초청한 뉴욕대 제롬 코언(Jerome Cohen·82) 교수의 말이다. 코언 교수는 “천 변호사가 이르면 다음주 초 뉴욕에 올 것 같다”며 “1년 과정이지만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9일(현지시간) 뉴욕대(NYU) 로스쿨 집무실에서 가진 중앙일보·JTBC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천을 처음 본 건 언제인가.

 “2003년 6월 뉴욕에서였다. 당시 그는 무명이었다. 국무부에서 꼭 한번 만나보라고 강권해 30분만 면담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4시간이 흘렀다. 그에겐 검은 안경 너머로 사람을 감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랐고 13살이 돼서야 제대로 된 교육을 처음 받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가 받은 유일한 대학교육도 맹인 안마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영특했고 언변이 뛰어났다. 유머감각도 일품이었다. 그리고 그해 중국에 가 다시 만났다.”

 -천의 방미 준비는.

 “그가 집 담을 넘을 때 여권을 가져오지 않은 게 실수였다(웃음). 여권부터 만들어야 해 시간이 걸리고 있다.”

 -한국계로 국무부 법률고문인 헤럴드 고가 천의 미국행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시각장애 인권변호사 천광청을 뉴욕대로 초청한 제롬 코언 교수(오른쪽)가 9일(현지시간) 로스쿨 집무실에서 본지 정경민 뉴욕특파원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처음엔 아니었다. 천이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했을 때 중국 정부는 격노했다. 천에게 가족과 생이별하고 미국대사관에서 영원히 살든가, 중국 병원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하다가 몇 년 뒤 유학을 떠나든가 택일하라고 압박했다. 그래서 헤럴드는 천이 대사관에 머무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천은 병원행을 고집했다.”

-그러다 천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 이유는.

 “나가고 보니까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대사관 측과 연락도 끊겼다. 이때 극도로 불안해졌던 것 같다. 헤럴드에게 외부 조언자가 필요하다며 나를 지목했다. 그래서 헤럴드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전화했고 천과 통화하기 시작했다. 천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행에 대해 언질을 주면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언질을 줬다. 그건 당시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기 때문이다.”

 -천이 클린턴 장관에게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한 말이 화제가 됐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영어는 딱 한 문장뿐이다. 그게 바로 당신과 키스하고 싶다는 거다. 그건 정말 고맙고 반갑다는 뜻이었다.”

 -천에게 건강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암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대장염을 수년 동안 앓았던 것 같다. 감옥에 있는 동안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탓이다. 심각하긴 하지만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내 아들 중 하나가 유명한 소화기 전문의다. 아들에게 곧 새 환자를 받게 될 거라고 말했더니 현실적인 아들은 ‘그분 보험은 있는 거죠’라고 묻더라.(웃음)”

 -그는 얼마나 뉴욕에 있게 되나.

 “애초 1년 기한으로 초청했다. 3개월이든 6개월이든 그가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다. 더 오래 있기를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천이 이곳에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강연을 한다면.

 “미국엔 중국에서 온 정치적 망명자가 많다. 그들은 지금 뭐든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미·중 관계가 타격을 입었나. 아마 언론도 몇 주 동안은 관심을 보일 테지만 그 후엔 조용해질 거다. 중국 정부가 기대하고 있는 것도 이게 아닐까.”

 -천의 체류가 길어지면 결국 망명으로 이어질 것이란 예측도 있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반체제 인사의 귀국을 허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천은 애국자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그를 받아줄지, 않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고 김대중 대통령을 구명했을 때 상황은.

 “1973년 8월 6일이었다. 당시 난 하버드 로스쿨 사무실에 있었다. 오후 1시쯤이었다. 워싱턴의 김 전 대통령 후원자인 이근팔씨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이씨는 70년 김 전 대통령의 1차 미국 도피 당시 인연을 맺은 뒤 80년대까지 그의 미국 생활을 뒷바라지한 인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됐다고 했다. 한국 중앙정보국이 그를 살해하려 하니 키신저에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당시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다. 바로 키신저에게 전화했는데 그는 사무실에 없었다. 그래서 키신저의 비서인 알렉산더 헤이그에게 전화했다. 헤이그는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사람이다. 오후 4~5시 정도 됐을 때 키신저에게 전화가 왔다. 납치 얘기를 했더니 알려줘서 고맙고 그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키신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나.

 “아무 정보도 없었던 것 같다. 한 가지 지금도 미스터리인 건 그가 그 이후 뭘 했는가다. 키신저는 훗날 회고록에도 그때 일에 대해 일절 언급을 안 했다. 당시 키신저는 인권문제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 전 대통령 구명에 나섰던 일을 말할 법한데 지금도 입을 다물고 있다. 사석에서 물었더니 그는 책의 내용과 맞지 않아서 넣지 않았다며 얼버무렸다. 일각에선 김 전 대통령을 구명한 게 키신저가 아니라 당시 한국데스크를 맡고 있었던 도널드 레이너드(레이너드는 73년 국무부 한국데스크 책임자였다)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일본 정부가 그를 구했을 수도 있다. 그건 아직도 미스터리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를 강제 북송하고 있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중국 정부는 탈북자를 한 사람씩 인터뷰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적 이유로 탈출한 사람은 절대 북한으로 돌려보내선 안 된다. 때론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는 최소한의 인권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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