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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함 속에 섬세함 … 충무공의 강단·기개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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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처음으로 공개된 이순신 장군의 친필(1598년 7월 8일) 편지. 최악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장군의 기개와 강단이 엿보이는 필체다. [김성룡 기자]

1598년(선조 31년) 7월, 더위는 혹독했다. 이순신(1545~98) 장군은 배탈로 고생 중이었다. 하지만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전쟁, 쉴 틈은 없었다. 임진왜란 말기. 장군은 괴멸 위기에 처한 조선 수군을 도우러 올 명나라 수군을 맞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9일 처음 공개된 이순신 장군의 친필 간찰(簡札·편지)은 노량해전 죽음을 넉 달여 앞둔 시기에 쓰여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편지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빠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힘있게 흘려 쓴 이순신 장군 특유의 서체를 접할 수 있는 드문 자료이기도 하다.

 명군을 위한 물품 조달을 담당한 관리 한효순(韓孝純·1543~1621)에게 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지에는 장군의 꼼꼼한 성품이 그대로 담겨있다. 일기를 쓰지 못할 정도로 바쁜 중에도 수고해준 동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장군의 인간됨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한 글씨=이번 간찰의 필체는 『난중일기』의 흘려쓴 초서체(草書體)보다 다소 정돈된 ‘행초서체(行草書體)’다.

『난중일기』한글 완역본을 출간한 초서연구가 노승석씨는 “평소 ‘날 일(日)’자를 점으로 표시하던 이순신 장군 서체의 특징이 이번 간찰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고 말했다. 가회고문서 연구소 하영휘 소장은 “힘과 속도감이 있는 글씨”라며 “학자들의 서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유의 결구(結構·짜임새)가 있다”고 평했다.

 특히 전장의 긴박함이 묻어나면서도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부드러움을 읽을 수 있다는 평가다. 서지학자 김영복씨는 “무인 특유의 묵직함이 살아있으면서도 따뜻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개와 강단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했다. 바쁜 전장에서 연습 없이 흘려 쓴 글씨로 보이지만, 일을 도와준 동료에 대한 애정과 사령관으로서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로 명군 감화시켜=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대부대의 도착을 앞두고, 당시 조선에서는 진린의 난폭한 성격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명나라 지원군의 위세에 눌려 조선 수군이 기를 펼 수 없을 거라는 우려도 높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포수 100명을 선발해 파견하면서 이순신 장군에게 편지를 써 명군과의 관계를 특별히 당부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삶을 다룬 『칼의 노래』의 소설가 김훈씨는 “당시 명나라 대군의 거처와 식량 등을 조달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라며 “이순신 장군이 특유의 꼼꼼함으로 연합군의 성패를 결정짓는 초기 대응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이번 간찰에서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기획실장 이상훈 교수도 “이순신 장군은 완벽한 환대로 진린 장군의 전폭적 신망을 얻어 명군을 장악했다. 2만 4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을 통솔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리더십의 힘”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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