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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남성권력의 예쁜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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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논설위원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이었다. 소위 ‘졸정제 세대’ 여성들이 언론계·법조계 등 남성 영역으로 꼽혔던 조직에 한둘씩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정계는 이보다 늦다. 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 실시를 앞두고 여성계가 여성할당제를 요구했고, 세계여성대회에선 ‘각 정부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도와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리고 97년 김대중 정부 들어 여성의 정계 진출과 여성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당시 ‘남성 조직’에 들어온 소수의 여성들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안에선 강한 마초주의에 부딪혔고, 바깥에선 소속 조직의 평등과 민주성을 입증하는 상징으로 내세워졌다. 그래서일 거다. 이 시기를 함께 한 여성들은 소속과 관계없는 일종의 연대감으로 여성의 차별화되는 자부심과 선배로서의 책임감을 치열하게 공유했다.

 가장 큰 자부심은 ‘여성은 더 정직하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마초 세계에선 자기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타인의 부정에 관대한 면이 있었다. 일종의 ‘생계적 연대감’이랄까. 마초들은 부정을 문제 삼아 남성 가장의 생계를 위태롭게 하는 일은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여성들은 부정에 훨씬 원칙적이고 저항적이다. 이에 되레 ‘여자들은 시야가 좁고, 제 말만 하고, 앞뒤가 꽉 막혔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도덕적 자부심은 조직 안에서 ‘남성의 앞잡이’가 아닌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큰 힘이었다.

 한데 요즘 이런 자부심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 갈등의 큰 축을 잡고 있는 이정희 대표와 김재연 당선인이 출발점이다. 이 대표는 지난 4·11 총선 직전 터진 부정경선 스캔들에 자신이 시킨 게 아니라며 버티더니, 도덕성에 흠집이 다 난 뒤에야 사퇴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경우도 염치도 내려놓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달동네 두부공장 종업원의 딸로 학력고사 인문계 여자 수석을 한 본받을 만한 그녀였기에 이런 모습은 더 안타깝다. 김 당선인의 경우 “나는 떳떳하다”며 사퇴를 거부했을 때 솔직히 믿고 싶었다. 그녀는 청년비례대표 경선으로 올라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경선에서조차 부정이 있었다는 증언이 터져 나온다.

 이는 여성으로서 연대감이 강한 우리 세대의 정직성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깼다. 동시에 ‘시야가 좁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에 오히려 주억거리게 되는 그들의 행태는 실망스럽다. 변명은 있다.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진영논리가 그들을 몰아가는 것이라고.

 그런데 ‘이정희는 그들의 추한 모습을 가리는 예쁜 얼굴’(진중권 동양대 교수), ‘김재연은 차세대 기획상품’이라는 말은 당황스럽다. 또 두 여성이 ‘수구 진보’ 남편의 ‘열녀’이기에 이토록 막무가내일 수 있다는 분석은 서글프다. 당 대표로, 청년비례대표로, 리더의 자리로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그들이 실은 자기의 능력이라기보다 ‘남성 권력의 얼굴마담’이라는 증언이 쇄도하고, 이에 공감이 가는 행동을 보여주니 반박논리도 궁색하다.

 한편으론 자리 못 잡고 헤매는 여성 정치인이 이들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우울하다. 지난 4·11 총선 당시 갈등 중재는커녕 주요 대목에선 무결정으로 일관했던 한명숙 전 민주당 대표의 한심한 리더십, 이제야 목소리 좀 내려나 했던 중진 여성 정치인들이 제 자리 하나 못 챙기고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며 뒷다리 긁는 소리나 했던 장면이 스친다. 19대 국회는 여성 의원 60% 이상을 초선으로 갈아치우고도 전체 의석의 15.7%가 여성이라며 자랑이다. 여전히 여성 의원은 숫자로 대우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여성 의원들이 당 우선주의의 세뇌 속도가 빠르고, 남성 권력에 전위대로 기꺼이 이용당한다”고 비판한다.

 정계에서 여성은 여전히 신참이며 마이너리티다. 주류집단에 먼저 진입한 소수자들은 자기 집단을 대표하고 후진들의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다. 높은 도덕성과 참신성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여성 정치인 스스로 ‘남성 권력의 예쁜 얼굴’을 용납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