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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회피의 악순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9호 18면

일러스트=강일구

“개천에서 용 난 주제에….”
“여자로서 매력은 털끝만큼도 없는 주제에….”

부부의사가 쓰는 性칼럼

배우자에게 ‘~주제에’ 타령을 하면서 상대를 극도로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부부를 보면 필자는 참담하다 못해 섬뜩하다. 부부문제나 성문제가 있는 환자들은 부부간 불신도 있을 수 있고, 각자의 불안·스트레스·성격문제나 신체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다. 부모나 자녀와의 관계 문제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결혼은 참으로 많은 삶의 고비를 함께 겪어야 할 인생 여정인데, 그 고비에 힘을 합치기는커녕 상대를 극단적으로 비난하거나 무시하면서 부부 사이를 회복 불가능의 상황으로 몰아간다.

최근에 필자가 만난 부부도 그렇다. 그야말로 겉보기엔 둘 다 훌륭한 엘리트요, 사회지도층이다. 그런데 남편의 무관심과 섹스리스에 화가 난 아내가 필자 앞에서 남편의 면전에 대고 ‘개천에서 용 난 주제에’라는 표현부터 시작해 비아냥을 서슴없이 퍼부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남편과 시댁의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 그 분노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남편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비난을 해대면 오히려 상대는 더 엇나갈 가능성이 크다.

원래 부부 갈등이나 성적 갈등에서 가장 흔한 패턴이 여성은 ‘비난’, 남성은 ‘회피’ 경향이다. 그런데 이 현상만큼 부부 사이에 위험한 함정은 없다. 비난과 회피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부부 사이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분명히 문제가 있고 잘못한 면도 많은 남편. 아내는 남편 때문에 그만큼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자체를 분노 표현으로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자에게 지나친 비난은 반감만 만들고 오히려 문제인식을 흐릴 뿐이다. 비난을 하면 할수록 남편은 아내를 피하고, 아내의 눈엔 남편이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같은 모습으로 보이니 더 화가 날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분노 조절이 안 되면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전문가의 의견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치료자가 잘못한 남편을 단단히 혼내줬으면 좋겠는데, 아내의 분노 조절 등 개선점을 조언하면 ‘남편이 나쁜 인간이지 왜 내 탓을 하느냐?’라며 펄펄 뛴다. 진료실에 앉은 자체가 ‘부부 사이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긍정적인 메시지인 반면, ‘너는 안 돼, 끝이야’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정적 메시지이니 이중적이다. 이런 이중적 메시지에 남편은 아내가 관계를 개선하자는 건지 끝내자는 건지 혼란스럽다. 결국 아내는 자신의 피해의식에 분노와 비난으로 남편 앞에 점점 더 높은 벽만 쌓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남편은 극복할 용기보다는 포기를 선택하고 만다.

부부 사이가 힘들 때 서로 마주 앉는 근본 취지는, 문제 해결과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이지 무조건 잘못한 쪽을 재판하고 욕하려는 게 아니다. 잘못도 인정해야 하지만,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보다는 각자 무엇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내가 상대를 도와줄 방법은 없는지, 상대를 비난하며 주제 타령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모습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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