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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린 서양인에게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겐 무례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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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25면

일러스트=최종윤

나는 독일에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비판심리학(Kritische Psychologie)’을 공부하러 갔다. 그러나 막 어학과정을 끝내고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할 즈음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아주 황당하게 무너졌다. 현실 사회주의도 동시에 아주 맥없이 사라졌다. 그 당시 내 정신적 방황은 말도 못했다. 베를린에 유학 온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만 그렇게 헤맨 것이 아니었다.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18>시간의 에디톨로지 - 단선론적 발달관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근대를 이끌어 왔던 사상적 동력인 역사발전에 관한 이념의 상실을 뜻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역사발전과 관련된 의도적 행위로 해석하던 근대 해석학적 체계는 자동적으로 해체되었다.

근대 성립 후 주체 형성에 따른 공간적·시간적 좌표 설정이 가능해졌다. 아울러 시간의 축에서 일어나는 세상의 변화를 주체의 행위에 의한 발전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단선론적 역사발전의 세계관이 나타난다. 이때 ‘의도성(intentionality)’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각 개인의 행동은 역사변혁을 위한 혁명적 행위이거나 반동적 행위로 설명된다. ‘단선론적 발달관’이란 이 세계의 모든 변화가 단 하나뿐인 시간의 축에서 동일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1837년 다윈이 그린 진화나무(evolutionary tree)

인류역사를 봉건주의,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해 간다고 해석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형적인 단선론적 발달관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식의 구체적 발달 단계는 거부하지만 인류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은 동일하며 뒤로 돌이킬 수 없는 합리화(rationalization) 또는 지성화(intellectualization)의 과정으로 파악한 막스 베버의 몰가치적 사회과학 방법론 또한 단선론적 발달관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일관성’과 ‘연속성’에 기초한 ‘하나의 역사’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은 언제나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빠른 시간도 있고, 느린 시간도 있고, 거의 정지한 듯 흐르지 않는 시간도 있다. 이러한 시간의 복수성에 관한 통찰은 아날학파로부터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적 역사인식의 키워드다.

사회(Gesellschaft)인가 문화(Kultur)인가
나는 사회(Gesellschft)와 문화(Kultur)의 개념 차이 또한 역사적 시간을 단수로 보느냐, 복수로 보느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밀도가 다른 것처럼 시간의 전개 방향 또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개념은 이러한 시간의 복수성을 제거한 개념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방식은 뉴욕이든 서울이든 아프리카 어디든 보편적 특징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문화’는 이러한 보편성의 근대적 강박에서 벗어나 있는 개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각각의 문화나 국가는 발달단계의 어떤 위치에 있고, 그 수준의 차이는 쉽게 비교될 수 있다는 단선론적 발달관이 우리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돼 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유학 당시 독일 사람들이 나를 일본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나인, 이히 빈 코레아너(Ich bin Koreaner)”라고 눈에 힘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사실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은 단선론적 발달 단계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베트남, 혹은 인도네시아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속으로 아주 불쾌해했다. 대한민국의 발달 수준이 적어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보다는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근대 서양인들이 일방적으로 일렬로 세워놓은 발달 단계론을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달의 정점에는 미국·유럽의 문화가 있고, 조금 처져서 일본이 있고, 중간 어디인가에 한국이 있다. 그리고 가장 밑에 베트남이나 기타 아프리카 나라들이 있다. 나는 이런 식의 일원론적 발달 단계를 머릿속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다. 그러나 세계화를 외치는 오늘날에도 이따위 일원론적 발달관은 여전히 강력한 표상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허연 얼굴의 키 큰 서양인들에게는 허망할 정도로 친절한 웃음을 짓지만, 작고 까무잡잡한 동남아시아인들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대하는 한심한 우리의 일상적 태도를 통해 지난 세기의 낡은 문화단계론은 오늘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비판심리학을 포기하고 비고츠키(Vygotsky)의 문화심리학으로 ‘전향’했을 때 이유 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학자들이 있다.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 필리프 아리에스(Phillpe Aries),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등등.

20세기 초·중반 기세등등하던 마르크스주의적 경제사관이나 베버식의 보편적 사회체제론에 치여 학계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이들이다. 물론 이들 또한 당시의 시대정신(Zeitgeist)이었던 보편사적 발전모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오늘날의 구조주의·구성주의와 같은 ‘문화의 상대적 구성성’에 관한 이론전개의 토대가 된다.

두 방향의 상반된 이론적 흐름을 개념적으로 요약해보면 한쪽에는 ‘발달(Entwicklung)’ 개념에 기초한 ‘사회(Gesellschaft)’, 다른 한쪽에는 ‘구성(Konstruktion)’ 개념에 기초한 문화(Kultur)’가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방식의 변화를 합리화의 과정으로 규정하는 사회개념은 ‘역사발전’이라는 근대이념의 산물이다. 반면 서구문화의 변화 양상이야말로 특수한 것이며, 각 문화단위의 삶의 방식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문화 구성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효용성이 사라지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사회과학적 논의의 중심에 선다. 이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삶의 내용, 의미들을 해석하는 것이 구성주의적 문화 연구의 중심 내용이 된다. 오늘날 ‘문화연구(cultual studies)’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다양한 문화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피아제 발달심리학 속 모더니티 폭력
‘사회는 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총론 차원의 단선론적 발달관은 피아제식의 발달심리학에서 각론의 완성이 이뤄진다. 피아제의 발달심리학,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인지발달심리학은 근대 발달이념의 변증법적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피아제의 심리학은 정서를 다루지 않는다. 정서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문사회과학에서 제외되었던 비합리적 인간관의 복원이다. 그 추세의 주동자인 대니얼 커너먼이 심리학자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데카르트 심신이원론 이후로 인간의 정서 영역은 오늘날까지 통제되지 않으면 위험한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인간의 불명확한 감정의 영역을 파고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몹시도 불편하여 강단심리학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이란 이 위험한 정서나 감정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과정이라고 설파한다. 원시적 감정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스리는 다양한 의례가 문명의 주된 구성 요소라는 것이다.

문명화 과정을 통해 수립된 정서의 외적 통제 방식을 각 개인이 내면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화 과정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집단적 정서통제가 문명화 과정이고 개인적 정서통제가 사회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의 뜻은 ‘예절 바른’이다. 당시 ‘예절 바른(civil)’은 오늘날의 ‘사회적인(social)’과 대략 동의어였다. 사회적인 존재는 예절 바른 존재여야만 한다는 뜻이다.

피아제는 이 위험하고 비합리적인 정서나 감정의 영역을 아예 심리학적 연구 대상에서 과감하게 제거한다. 다뤄도 인지발달과 관련된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다룬다. 예를 들어 도덕성 발달을 ‘규칙을 인식하는 수준’과 같은 인지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대신 문화적 환경과는 상관없는 아동의 보편적 인지발달을 주장한다. 서유럽을 기준으로 하는 보편적 역사발전이론이 어느 정도 자리 잡자, 그동안 막연히 그려왔던 보편적 인간발달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 누구나 달달 외워야 했던 피아제식의 인지발달론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된다. 감각운동기-전조작기-구체적 조작기-형식적 조작기.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에 따르면 추상적 사고, 보편적 사고가 가능한 형식적 조작기는 대략 15세에 완성된다. 대략 이 수준에는 올라야 문명화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피아제에게 문화적 차이는 인지발달 수준의 차이가 된다. 열등한 문명과 고등 문명의 차이는 아이와 어른의 인지능력 차이와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고등문명은 열등한 문명을 계몽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앞서서 근대적 국가 형태를 이뤄낸 서유럽 국가들이 일사불란하게 제국주의적 전략을 취할 때 요구되었던 식민지 지배의 윤리적·논리적 정당성은 이렇게 간단하게 획득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의 ‘발생반복설(recapitulation theory)’의 세련된 변형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헤켈의 발생반복설은 생물학적으로는 그리 치밀한 이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열등한 문화와 고등문화를 판단하기 위한 아주 훌륭한 척도가 된다.
그래서 서양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설명하다 보면 그런 반응을 자주 경험하게 되는 거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랬었어.’ 하지만 헤켈의 발생반복설은 아주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면, 도대체 ‘새로운 것’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매번 반복할 뿐인데 새로운 ‘변종’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의 발달은 또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헤켈의 발생반복설과 찰스 다윈(C.R. Darwin)의 ‘자연선택설’에 기초한 진화론을 자주 헛갈려 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헤켈의 이론은 발달의 방향이 정해져 있는 반면,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발달이 어느 방향으로 이뤄질지 모른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그때그때 자연에 의해 선택되기 때문이다. 다윈에 따르면 생명의 발전이란 마치 나뭇가지가 큰 가지에서 작은 가지로 갈라져 나가듯,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지극히 우연적인 현상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당시 종교계로부터 거부당한 것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때문만이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역사 발전의 방향성, 즉 발전의 목적 상실이 더 큰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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