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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마오 주석 아니었으면 자산계급에 패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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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호 29면

1961년 3월 류샤오치가 광저우(廣州)에서 광둥성 서기 자오쯔양(趙紫陽왼쪽)의 영접을 받고 있다. 류샤오치 사망 20년 후 자오쯔양도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부주석에서 쫓겨났다. [사진 김명호]

1966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자신이 직접 써 붙인 대자보에서 당내의 자산계급사령부를 타도 대상으로 단정했다. 사령부가 있으면 사령관이 있기 마련.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가주석 류샤오치에 대한 적의를 만천하에 공표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날 밤 저우언라이는 다롄(大連)에서 요양 중인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임표)에게 급전을 보냈다.
린뱌오는 건국 이후 항상 환자였다. 몸이 아프건 안 아프건 건강을 이유로 요양만 다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오쩌둥에 대해 “책임지겠다며 큰소리 안 치고, 쓸데없는 건의와 심기 상할 짓 안 한다”는 삼불주의(三不主義)와 “주석이 한마디 하면 맞장구치며, 찬양하고, 좋은 소식만 전한다”는 삼요주의(三要主義)가 기본전략이었다. 공식석상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7>

전문을 받아본 린뱌오는 일기장을 펼쳤다. 3개월 전 일기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다롄을 떠났다. 린뱌오는 5월 23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베이징 서기 펑전(彭眞·팽진)과 군사위원회 비서장 양상쿤(楊尙昆·양상곤) 등의 직무가 정지되는 것을 보고 “첫걸음에 불과하다. 다음은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의 차례다. 모두 마오쩌둥의 음모다”라는 일기를 남긴 적이 있었다.

8월 6일, 회의장에 린뱌오가 나타나자 참석자들은 경악했다. 누가 뭐래도 천하의 린뱌오였다. 육·해·공군을 장악하고 있는 대(大)전략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했다. “문화대혁명의 최고사령관은 우리의 마오 주석이다. 주석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던 국면을 전환시켰다. 주석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문화대혁명은 요절하고 우리는 자산계급에 철저히 패배당했다.” 해방군 최고책임자의 이 한마디는 전군이 마오쩌둥의 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명분이나 핑계도 결국은 그게 그거였다. 같은 편이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했다.

회의는 거칠 게 없었다. 린뱌오 발언 다음 날, 흔히들 16조(十六條)라 부르는 문화대혁명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혁명은 투쟁 목표와 방향이 분명해야 했다. ‘자본주의를 추구한 당권파와 자산계급 반동학술 권위’들을 타도와 비판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마지막 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11명을 선출했다. 류샤오치는 서열 2위에서 8위로 추락하고 린뱌오는 6위에서 2위로 급상승했다. 당의 유일한 부주석까지 꿰찼다.

마오쩌둥은 거처를 인민대회당으로 옮겼다. 1967년 1월 13일 밤 류샤오치는 마오가 보낸 차를 타고 인민대회당으로 갔다. 문 앞에 나와 있던 마오는 류샤오치의 손을 잡고 부인과 딸들의 안부부터 물었다. 정말 복잡한 사람이었다.

류샤오치가 과오를 시인했다. “내 잘못이 크다. 노선 착오였다. 간부들은 당의 소중한 자산이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국가주석과 중앙당 상무위원, 마오쩌둥 선집 편찬위원회 주임직을 사직하겠다. 집사람과 애들 데리고 옌안이나 고향에 가서 농부가 되겠다. 문혁은 빨리 끝날수록 좋다.” 마오쩌둥은 답변을 안 했다. 수십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를 완전히 제거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이별이 아쉬워 마련한 자리인 줄 류샤오치는 몰랐다.

홍위병들이 류샤오치가 사는 중난하이를 포위했다. 낮과 밤 할 것 없이 “류샤오치 타도”를 외쳐댔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잠들을 잘 수 없었다. 마오는 잠자는 시간만이라도 중지시키려는 경호원들을 제지했다. “내버려 둬라. 나는 조용한 것보다 시끄러운 게 좋다. 새로운 것이 탄생할 때는 시끄러운 법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돼지 새끼가 태어날 때도 온 동네가 밤새도록 시끄러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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