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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풀어준 성폭행범, 18일 만에 보복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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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법원이 “도주 우려가 없다”며 성폭행범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석방한 지 18일 만에 범인이 피해 여성을 다시 찾아가 살해한 ‘보복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성폭행범 등 강력범에 대한 법원의 영장 기준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살인 혐의로 중국동포 이모(44)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23일 밝혔다. 이씨는 지난 21일 서울 가산동 옛 동거녀 강모(43·중국 동포)씨의 집에 찾아가 칼로 강씨의 얼굴·등·다리 등을 32차례 찔러 숨지게 한 혐의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8월 지인의 소개로 강씨를 만나 9월 가산동 이씨의 원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이씨는 지난해 2월 한국에 입국한 뒤 서울 영등포의 철물공장에서 노동일을 하며 받은 일당 4만원으로 생활해 왔다. 동거 기간 내내 생활비 부담 문제로 다툼이 잦았고 결국 두 사람은 지난 2월 헤어졌다. 지난달 21일 이씨는 “다시 만나자”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강씨를 자신의 집에 감금한 뒤 성폭행했다. 사흘간 갇혀 있던 강씨는 지난달 24일 이씨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쳐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에서 강씨는 “예전에도 ‘죽인다’는 협박을 많이 했기 때문에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경찰에서 “뺨을 때린 폭행은 인정하지만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은 강씨의 몸에 있는 멍자국, 도망치자마자 경찰에 신고한 점 등을 고려해 2일 이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3일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이씨를 풀어줬다. ‘주거가 일정해 도주의 우려가 없고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박강준 영장전담판사는 “강씨가 이씨의 집으로 먼저 찾아갔기 때문에 감금의 근거가 부족했고, 이씨가 혼자 살긴 하지만 성실한 태도로 수사에 임해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경찰에서 풀려난 이씨는 21일 자신을 신고한 강씨에게 찾아가 강씨를 살해한 것이다.

 경찰은 이씨가 “강씨가 ‘그간 부담한 생활비 130만원을 달라’고 종용해 (사건 당일) 다툼이 있었으며 우발적으로 살인했다”고 주장하나 진술이 매번 엇갈린 데다 “경찰에 신고한 게 화가 나 찔렀다”고 진술하는 등 계획적으로 보복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강력사건이기 때문에 법원에 재범 가능성을 강조하고 강씨가 여러 차례 협박을 당했다는 문자 기록도 확보해 증거로 제출했으나, 법원에선 피의자의 방어권을 우선시한 듯하다”며 “당시 이씨가 구속됐으면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씨와 이씨의 주거지는 불과 2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강씨는 줄곧 불안감을 토로해 경찰의 권유로 제주도 지인의 집에 피신해 있다 ‘이씨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경찰이 제공한 문자 기록에 협박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이 법원에 제출한 수사 기록엔 ‘가만두지 않겠다’ ‘너 인제 내 눈에 띄지 마라’ 등 30여 건의 협박성 문자 메시지가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 관계자는 “성폭행과 같은 강력범죄에 ‘피의자 부인’ ‘거주지 일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라며 “이미 그 전 사건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협박 등 보복, 재범의 조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장을 기각한 것은 논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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